UX와 병원은 서로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어떻게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두 분야가 만났으며, 이 둘이 어떤 시너지를 만들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해보면 둘은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것 처럼 느껴진다. 일단 병원은 치료하는 곳이지 휴대폰같은 기기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조직이 아니기도 하고, 정부 규제상 의료기관은 의료 마케팅이나 의료 이외의 수익사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정 되어 있기 때문에 신사업을 통한 수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곳이 아니라서 딱히 새로움과 혁신에 대한 요구가 다른 산업대비 적을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둘의 첫 만남이 약 20년 전 미국 최고 병원에서 일어났다.
✅ Mayo Clinic의 새로운 시도 ‘환자중심병원’
글로벌 병원평가에서 Top3에 항상 자리하는 (미국)메이요클리닉 <이미지:단대신문>
2000년 초반이었다. 미국 최고 병원 중 하나인 MayoClinic의 의학부 학장 Nicholas LaRusso박사와 ,부학장 Michael BrennanNicholas 박사는 의료를 혁신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던중 한가지 흥미로운 제안을 하게된다. (*참고로 MayoClinic은 세계 병원 평가에서 존스홉킨스 병원과 함께 매년 최상위에 랭크되며 항상 고난도 난치병 치료를 위한 혁신적인 치료법을 추구하는 가장 존경받는 병원으로서, 의사 4000명, 직원 57000명, 연 50만명 환자 규모의, 1889년 로체스터에 세워진 대형 병원이다.)
"우리가 의학을 연구 할때는 가설을 세우고, 확인하고, 맞으면 리서치를 실행하고, 이를 마치면 분석하고 리포트로 만들어서 지식이 축적되는 Evidence based 방식의 연구 체계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효율적인 치료 과정에 있어서는 딱히 이렇게 접근한적이 없었던것 같아... 이런 방식을 동일하게 환자 치료 과정 효율화에도 적용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 둘은 병원 밖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그당시 컴퓨터와 사람간의 인터렉션을 쉽게 만들기위해 최초로 마우스라는 기기를 만들어서 유명해진 디자인회사, IDEO 에게 '의사와 환자간의 인터렉션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하는가?'에 대해 컨설팅을 의뢰했다.
Mayo clinic의 환자경험 혁신조직 'Center For Innovation' <이미지:Beckers hospital>
그 이후로 Michael BrennanNicholas 박사는 2004년 SPARC (See,Plan,Act,Refine,Communicate)라는 연구소를 세우고, 다수의 의사와 디자이너들을 모집해서, 환자경험을 높이면서 환자치료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디자인씽킹을 활용해서 찾고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약의 복용법 효능과 부작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디자인한 원페이지 복약 가이드를 환자에게 제공하여 환자들의 복약 순응도를 높이거나, 공항에서 활용하는 키오스크 체크인 방식을 병원에 도입하고, 진료 테이블을 라운드 형태로 바꾸고 보호자가 들어와도 좁지 않게 진료실을 리디자인하는등의 의미있는 결과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즉, 디자인씽킹을 활용해서 병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조금씩 증명한 것이다.
이렇게 SPARC Lab이 개소한지 2년만에 20개 프로젝트를 운영할 만큼 혁신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2008년에는 부서 명칭을 CFI(Center For Innovationn)로 바꾸고, 지금은 디자이너, 엔지니어, 과학자등 50여명이 넘는 전문가와 50여명의 의료진, 총 100여명으로 이뤄진 팀에서 첫 개소후 3년간 100여개가 넘는 혁신과제를 추진하며 메이요클리닉의 의료서비스의 경험과 전달 방식에 대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혁신을 이루는 구성원이 의료진만으로 이뤄진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의료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병원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다학제적으로 바라보고, 실제 그 문제를 엔지니어들과 함께 만들어보고 임상현장에 적용하며 테스트하고, 이를 확산시켜가는 방식으로 즉, 디자인씽킹 방법론을 활용하여 병원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가고 있다는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이룬 결과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넓은 미국전역의 환자가 병원으로 오지 않아도 집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 내에서는 불가능하거나 위험하다고 이야기 되던 시절) 원격진료시스템 인프라를 개발하고, 그 비용을 미국 보험사가 지불하도록 사업모델을 만들어서 환자을 대상으로한 의료서비스 전달 방식을 혁신하기도 하지만, 점점 줄어드는 의사 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방의 1차 의료기관과 메이요클리닉의 의사가 원격으로 협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중환자들의 상태를 원격으로 모니터링해서 현장 의료진에게 알람해주고, 즉시 응급처방을 지시하는 원격 중환자실(e-ICU)을 만드는등 병원내 의료서비스 제공자의 의료업무 효율화를 위한 혁신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병원 혁신 활동들은 MayoClinic 뿐 아니라 Cleveland Clinic의 'Office of Patient Experience', Kaiser Permenente의 'Innovation Consultancy', UCLA Health의 'Institute for innovation in health'같은 미국 최고 병원들에서도 공통적으로 CFI와 같은 별도의 혁신 부서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해외 사례는 우리에게 두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OK, 병원에 UX가 필요할 수 있다는건 알겠다. 하지만 해외 병원들은 정부와 기업들로부터 수백억의 기부를 받으면서 이런 전문인력을 활용한 혁신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정부의 규제 속에서 매년 적자를 이어가고 있는 ’국내 병원의 환경에서도 이런 UX를 활용한 혁신 활동들이 가능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럼 이제 국내의 병원혁신 상황을 한번 알아보자.
국내 주요병원들과 보건의료관련 국가기관, 그리고 관련 주요 업체들이 해마다 참여하는 대한병원협회 주관의 KHC(Korea Health Congress)라는 대규모 병원산업계의 컨퍼런스가 있다. 이 자리는 국내 의료산업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이 모여서 국내 병원의 미래방향을 논의하는 매우 비중있는 행사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011년 이 행사에서 ‘새로운 서비스 디자인과 보건의료 혁신’이라는 주제 아래, 12개국 28명의 세계 석학들이 병원디자인, 의료관광, 스마트케어등 그당시 세계병원산업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사례들이 발표되었다. 이날의 주요 키워드는 '서비스디자인'이었으며, 위에서 언급했던 MayoClinic과 ClevelandClinic에서도 ‘병원혁신’에 대해 아래 3가지 주제로 강연을 했다.
1. 환자경험 관리 및 병원 혁신 (제임스 메를리노 클리블랜드 병원 부원장 및 환자경험센터장)
2. 메이요병원의 정책, 전략, 그리고 혁신 (더글라스 우드 메이요병원 기획정책실장)
3. 의료 제공을 변형시키기 위한 혁신과 디자인적 사고 (바바라 스푸리어, 메이요병원 혁신센터장)
이날 강연에서 국내 병원에 처음 소개된 개념이 바로 '서비스디자인, 디자인씽킹, 디자인경영'이다. 그당시 이 개념들은 병원과 관련없는 일반 기업들의 사례에서만 접하던 개념이었는데, 이 키워들을 다름아닌 병원 컨퍼런스에서 논의 된다는점, 그리고 항상 국내에서 벤치마킹 대상으로 여겨왔던 미국 병원들이 의료 기술이 아닌 디자인씽킹을 통한 병원 혁신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점, 또한 이것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환자만족을 통한 재방문률/수익 향상, 비용절감, 직원근로환경 개선, 환자안전 확보'라는 엄청난 성과를 만들고 있다는점,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런 서비스 디자인을 병원에 적용한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국내 의료진들에게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서울아산병원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 사무실
이 컨퍼런스는 이후 국내 병원에 많은 영향을 일으켰다. 가장 큰 변화는 대형병원들을 중심으로 환자중심의 서비스디자인을 위한 병원혁신 전담 부서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2013년 1월 국내 최고 병원인 서울아산병원에서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를 개소한 이후로, 명지병원의 케어디자인센터, 삼성서울병원의 '혁신센터', 세브란스병원의 '창의센터', 서울시의료원의 '시민공감 서비스디자인센터', 고대안암병원의 키노디자인센터‘ 같은 병원 혁신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2014년에는 HiPex(Hospital Innovation & Patient Experience Conference)라는 환자경험과 서비스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병원혁신 사례를 공유하는 첫 컨퍼런스가 명지병원에서 열렸다. 그 행사에서는 실제 병원내 임상현장에서 적용되었던 사례들을 공유 하면서 실제로 병원 실무자들이 어떻게 병원에 적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자리로 현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환자경험을 정부에서 평가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017년부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는 매년 전국 상급종합병원들을 대상으로 환자경험을 평가하고 있다. 환자 중심으로 의료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지에 대해 '의사영역, 간호사영역, 투약 및 치료과정, 병원환경, 환자권리보장, 전반적 평가' 6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온라인 설문으로 환자들이 평가하여 종합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이를통해 환자중심 의료문화를 확산하고, 실질적으로는 의료 수가에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하는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국가 차원에서 환자중심 의료서비스 체계를 독려하기 시작하여 병원들이 환자중심병원에 대해 인식뿐 아니라 실천하도록 제도화 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큰 변화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서울아산병원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에서 주관한 스마트 수술실 프로젝트의 디자인 이미지
국내 병원산업에 Design thinking과 서비스디자인 개념이 처음 소개된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런 노력들의 결과로 이제는 이런 병원들의 노력들이 해외에 소개 되면서 IF, 레드닷, SDN(Service Design Network)같은 글로벌 서비스디자인관련 어워드에서 일반 글로벌 업체들과 겨루어 수상하면서 병원의 서비스디자인 역량을 인정받고 있으며, 2021 국가고객만족도(NCSI) 점수 전체 순위에서 4개의 병원이 상위 5위 안에 랭크되는등 병원 서비스디자인의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더욱 의미있는것은 2022 환자경험평가에서 상위에 랭크된 병원들이 이제는 대형병원이 아니라 NK세종병원, 대구 곽병원, 계명대 대구동산병원, 세종충남대병원, 순천향대 천안병원, 용인세브란스병원, 부산백병원,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인하대병원 같은 지방병원들이 상위 Top10에 랭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동안 국내 병원 전반에 Design Thinking과 서비스디자인이 이미 자리를 잘 잡았다는것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해석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