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 : 이른바 "헬조선"을 벗어던지기 위한 여행
터키에서 여행을 할 때, 사람이 아닌 친구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거리에서나, 상점에서나, 심지어는 숙소에서도 그들은 자주 출몰하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이 사는 곳에 우리가 출몰한 것이 맞을 듯하다. 그들은 바로 고양이들이다.
터키의 아름답고 오묘한 지형이 만들어낸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에 가면 화산이 만들어낸 절묘한 기암괴석들에 마음이 빼앗길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하늘에 떠있는 형형색색의 열기구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정말 지구에 있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 조금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툭 치고 있다. 바로 고양이들이다.
샤방샤방한 고양이들을 어디서나 볼 수가 있다!
밤늦게 카파도키아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카파도키아의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카파도키아는 정말로 신기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신기하고 절묘한 풍경이 앞에 펼쳐 있었던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모습에, 거기에 카파도키아의 그 유명한 열기구들이 내 머리 위로 다니는 모습이 ‘내가 여행을 왔구나’라는 느낌을 들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카파도키아의 자연환경과 어울리는 동굴호텔에서 묵게 되면, 대게 아침식사는 카파도키아의 절경이 보이는 야외 테라스에서 먹게 된다. 아침을 맛있게 먹으려 하는데 누군가가 내 발을 툭 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고양이였다. 이 놈. 정말 간절하게 나를 쳐다보는데 도저히 음식을 나눠주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의 실사판이랄까? 그렇게 음식을 나눠주는데, 이젠 대놓고 앉아 있는 의자로 올라와서 테이블에 놓인 아침식사를 함께 뺏어 먹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내 식사를 가로챈 후, 유유히 다른 테이블로 가서 또 달라고 하고, 거기에도 먹을 것이 없자 이젠 다른 숙소로 휙 떠나서 그쪽에 가서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 돼! 속으면 안 돼!!!!!
처음에는 그 모습이 황당하고, 또 재미있었으나, 이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함께 동물들과 공존하는구나!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누구도 해를 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우리들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터키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비단 카파도키아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터키에 가고 오는 이스탄불에는 숙소 곳곳에 고양이들을 위한 사료통과 물통이 비치되어 있다. 적어도 다니면서 고양이들이 굶지 않게, 또 목마르지 않게 만드는 그들의 인심이 참으로 부러울 뿐이다.
이스탄불에서 참 많은 고양이들을 보았다. 그런데 요놈들 참 겁도 없다. 엄연히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의 유리 진열장에서도, 터키 하면 생각나는 카펫 판매 상점의 카펫 위에서도 오히려 자기를 진열하듯이 도란도란 자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고 또 내쫓지 않는다.
터키 남동부 지중해 지역에 있는 안탈리아 지역에 갔을 때이다. 칼레이치 옛 항구터에는 재미있는 시설이 하나 있다. 나무 모양의 서랍장과 같은, 그리고 그 서랍장을 철장이 덮고 있는 시설. 바로 길고양이 숙소이다. 잠을 잘 때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말라고, 그렇게 편하게 잠이라도 자라고 배려하는 길고양이 숙소는 저절로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모습들이 터키의 고양이들이 사람을 겁내지 않게 만든 원인일 것이다. 사람을 보고 만져달라고 하고, 사람이 아무리 와도 도망가지 않는 모습은 우리의 길고양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고양이를 길로 내몬 것도 사람이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길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원인도 역시 사람에게 있다.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버스로 약 3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해변 마을인 에사우이라는 최근 관광객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는 곳이다. 이 에사우이라 역시, 터키에 못지않게 고양이들의 천국이다.
에사우이라의 고양이는 사람들이 크게 해를 가한 경험이 없는지, 여행객을 봐도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그곳이 자기가 생활하는 지역이고, 우리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이리라.
에사우이라의 고양이들은 숙소 앞에서 나란히 햇볕을 쬐고 졸고 있었고, 또 다른 고양이들은 생선을 던져주자 우르르 와서 먹고 더 없냐고 눈을 마주친다. 에사우이라의 숙소 주인은 자기 집 앞의 앉아 있는 저 고양이들이 숙소를 지키는 하우스키퍼라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문득 우리나라를 떠올려본다. 이렇게 이쁘고 평화로운 고양이들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도둑고양이라며 내쫓기에 여념이 없다. 굳이 내쫓지 않더라도 길에서 사람들에게, 차들에게 휘둘리며 도망가는 고양이들은 한없이 안쓰럽다.
그러다, 로드킬이라도 당하는 고양이들을 볼 때면 사람으로서, 차를 타는 운전자로서 죄스러워진다. 로드킬을 막을 수 있도록 펜스나 관리방법을 보다 강화할 수는 없을까? 말 못 할 동물이니 그저 죽어도 되는 것일까? 작은 고양이 하나 살리지 못하면서, 인간은 무엇을 위해 내달리고 있는 것일까?
모로코의 고양이가 다시금 생각이 난다.
인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인도에 가기 전 인도 델리에서 자이푸르가 180km 정도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아마 한 2~3시간이면 가겠거니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지에 도착하고 나니 그 기대는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워낙 도로포장이 잘 안 되어 있는데다가, 우리가 탄 차량이 오래되기도 했고, 걸핏하면 공사 중이다 보니 고속도로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더 속도를 낼 수 없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도로 곳곳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소 때문이었다.
인도에서의 소는 사람보다 귀한 존재이다. 소를 신성하다고 여겨 쇠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 그러다 보니 도로에 소를 보게 되면 차량이 비켜가야 한다. 만약 소가 모든 도로를 막고 있다면? 역시 소가 비키길 기다려야 한다. 언제 소가 누워있을지 모르다 보니 운전자들이 제 아무리 좋은 차라 하더라도 속도를 내기는 쉽지 않다. 그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함께 마음의 여유를 찾는 수밖에 없다.
염소도 마찬가지이다. 도로에 염소 무리들이 지나가면? 염소 무리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지 별 수 있겠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러한 염소 무리들에게 길을 양보하고서야 목적지에 갈 수 있다 보니, 델리에서 자이푸르까지 가는데 꼬박 7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인도에 가면 절대 예상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대는 접길 바란다.
인도에서 동물들이 크게 해를 가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을 델리의 유명한 유적지인 구뜹미나르에서도 느꼈다. 구뜹미나르는 인도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이며, 가장 높은 승전탑이다. 사실, 구뜹미나르에 다녀온 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구뜹미나르가 아니었다.
구뜹미나르 앞에서 더워서 쉬고 있는데, 앞에 다람쥐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람쥐에게 먹을 것을 주자, 마치 사람처럼 손으로 잘 받아먹는다. 사람이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 다람쥐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오히려 내게 웃음과 여유를 찾게 해주어 고마웠다.
몇 해 전, 이탈리아 로마에 유럽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로 백화점이 개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로마에 갔을 때 들려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공항에서 가까운 백화점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백화점 곳곳에 오벨리스크가 있고, 백화점 가장 상층부에는 마치 판테온 신전에서 본 것과 같은 돔 모양의 장식이 참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앞에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내 눈을 의심하였다. 반려견을 목줄을 하고 함께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화점에 반려견을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기는 했어도, 이렇게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은 좀 뜻밖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구도 신기하게 보지 않고, 또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왜 백화점에 반려견과 함께 거닐면 안 되는지에 대한 논리적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많이 양보해서, 레스토랑이야 반려동물의 털이 날릴 수도 있어서 못 들어간다고 해도, 그러한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실내에서의 동물 출입은 자연스러워도 되지 않을까?
언젠가부터 우리 주위에서 동물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집 안에서 키우는 나의 반려동물이 아니면, 집 밖에서 보이는 동물은 모두가 적으로 규정된다. 길고양이는 쓰레기를 뒤지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이른바 도둑고양이로 전락되었다. 서울의 한 부자 아파트에서는 길고양이들이 지하 보일러실에 드나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굶어 죽게 만든다.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 산을 내려오는 멧돼지는 모두 죽여야 하는 대상이다. 사람들이 멧돼지의 식량 텃밭은 개간하여 먹을 것이 없는 것은 그저 멧돼지의 사정이다. 내려오는 즉시 사냥의 대상이 된다. 동물의 생활을 고려하지 않은 도로들은 로드킬을 양산해내고 있다. 먹이를 찾아, 또 가족을 찾아 길을 건널 수밖에 없지만, 그 길을 건너는 동물들은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각료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중간 휴식시간에 각료들과의 대화에서 한 관료가 이야기한다.
“야생동물들이 도로를 건너다가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는데,
길 아래로 지하 통로를 만들어서 야생동물들이 다닐 수 있게 합시다”
그때 대통령이 한 말이 참으로 일품이다.
“그 배우지도 못한 놈한테 알아서 밑으로 지나다니라 하면 되겠습니까?
그 놈들은 그냥 다니게 하고 사람이 그 위로 다니면 되지”
우문현답이닷!
사람 중심의 개발, 그리고 사람만의 세상으로 만들다 보니 동물들이 살 곳이 없다. 동물과의 공존을 위한다 하면서 결국은 사람 위주로 결정하고,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 만큼만 동물을 고려하는 형국에 진정으로 동물과 공존할 마음이 있는지 자문해본다.
<고릴라 이스마엘>이라는 책이 있다. 말을 할 줄 아는 고릴라 이스마엘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인간 제자를 모집하여 그에게 인간이 그동안 가져온 환경 파괴의 문제점과 동물과 공존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보여주는 책이다.
<고릴라 이스마엘>에 나온 한 구절을 소개해 본다. 이 글은 고릴라 이스마엘이 인간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비행기를 만드는 초기 단계에서, 비행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근거로 페달을 밟아 날개를 움직여 날아가는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비행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갔다. 우리 미래의 비행사는 절벽 끝에서 밀려 부지런히 페달을 밟고 비행기의 날개를 미친 듯이 날개를 움직였다. 그는 기분이 아주 좋다. 황홀지경이다. 그는 공중의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 비행기가 공기 역학적으로 비행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비행기는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법칙을 따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는 날개를 보며 '저걸 봐. 새하고 똑같잖아!'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다. 그는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받침대 없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유 낙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곡을 내려보고 있으며 발견하는 것이 있다. 자기 고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사실은 땅이 그를 향해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별로 걱정은 하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그의 비행은 완전한 성공이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성공을 거두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조금만 더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심상치가 않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초속 32피트의 속도로, 점점 가속이 붙으면서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땅은 무섭게 그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다. 그는 좀 불안했지만 절망은 하지 않았다. '네 비행기는 이만큼이나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어. 그냥 계속 가기만 하면 돼'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서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왜냐하면 그의 비행기는 공기역학의 법칙을 따르고 있지 않으니까.
바로 이러한 운명을 인간은 타고났다. 약 1만 년 전, 인간은 이와 비슷한 비행기를 날렸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비행기이다."
우리가 그동안 옳다고 여겨 왔던 모습, 그렇게 발전해 오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쩌면 잘못된 길로 가는 모습을 위안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터키를 다시 가보고 싶은 이유는 터키 사람들의 친절함과 그들의 독특한 문화, 그리고 맛있는 터키 음식 등 너무 많은 이유들이 있다. 아직도 터키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이 “너 어디서 왔니?”라고 물어볼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이야기하는 “브라더! 우리는 형제의 국가야!”라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해주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한국이라는 나라를 좋아하고 반겨주는 나라 중 하나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정말 다시 터키를 가보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다. 숙소에서 우리 식사를 능청스럽게 빼앗아먹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빛. 카펫 위에서 잠을 청하면서 ‘나는 잘 테니 너는 날 깨우지 말고 비켜서 지나가’라고 말하는 듯한 카펫 위의 고양이. 그리고 숙소 테라스에서 에스프레소를 먹고 여유 있게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앞으로 지나가면서 먹을 것 없나 하고 바라보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너무 그립다.
동물과 공존하는 터키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곳의 사람들은 정말 평화롭고 베풀 줄 아는구나라고 생각이 든다. 이러한 나라라면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실제로도 터키는 그동안 다녀온 여행지 중 가장 편하게 다녀본 곳 중 하나이다. 내가 고양이가 된 느낌이랄까? 여행에 가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이 마치 카펫에 누워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내 모습과 동일시되었다.
동물들과 공존할 수 없는 우리들이 더 부자가 되고 삶이 여유로워지면 그때에는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터키도, 인도도 경제적인 여유를 놓고 볼 때에는 우리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각박한 세상을 만들어놓고 나의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더 행복하고 여유로운 세상이 되길 바라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누군가는 캣맘들에게 고양이 사료를 주지 말라고 자보를 붙여놓는다. 외국인들이 여행을 와서, 그 자보를 보고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조금은 더 부끄러워진다. 나는 공존하는 여행이 좋다. 그리고 공존하는 우리 세상을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