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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Jan 30. 2017

내가 아닌, 너를 사랑한다는 건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고


2.내가 아닌, 너를 사랑한다는 건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4.

2017년 1월 10일에 한 번, 27일에 한 번 더 책을 덮고 씁니다.



  나는 M을 사랑했고, 지금은 그 추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기억되는, 회상되는 M은 더 이상 실재하는 M이 아니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고,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결코 실재하는 M 그 자체가 절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기억에 의존하여 지어졌던 M이라는 사람에 대해서이다. 그 사랑의 기억에 관한 것일 뿐이다.

  사랑은 그러하다. 결국엔 그것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며, 궁극적인 사랑은 타자에 대한 이해이며, 때론 그것은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오해이다. 그것이 사랑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낯선 이방인인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서로가 일생에 단 한번뿐인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함께”라는 순간들을 보내지만 결국 헤어지면 서로에게 멀어지고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이, 기억 속에서만 그 사랑은 머물고 그로 인해 다시 서로는 서로에게 이해할 수 없는 타인, 하나가 될 수 없는, 내가 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결국은 “나는 M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M과의 사랑에서 도망쳤다. 결국 그 사랑은 사랑으로 완전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우리 사이에 언어라는 도구가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나가 믿는 음악이라는 것으로 대화를 했다면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순수한 완전한 것에 대한 열망은 결국 모순적이게도 내가 타자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게 한다. M과 나의 사랑은 언어처럼 불완전했다. 그 사랑의 모습은 첫날 내가 M에게 독일어 강습을 받았던 것과 흡사하다.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언어들을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언어들을 읊었다. 나는 그 내용을 M의 변하는 표정을 보며 어설프게 알아차렸을 뿐이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으며, 그것은 M과 공유되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때의 공기에는 불안이 서려있다. 언어는 그처럼 불투명하다. M과 나가 사랑하면서 나눈 대화들은 언어로 이어져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는 불투명하다.

  

  서로에게 우리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사랑으로 우리는 그 간극을 메꾸려고 꾀한다. 하지만 그 노력의 끝,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끝에 서있는 것은 ‘나’ 인 경우가 많다. 사랑을 지키려고 하는, 반대로 버리려고 하는 노력의 끝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결과로 치닫는다. 결국에 우리가 가장 고려하는 것은 나 자신에 관해서일뿐이다. 타인에 대한 강한 열망은 결국 소유욕으로 연결되고 소유욕은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종속시키려는 이기심일 뿐이다. 이러한 이기심의 발로는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알 수도 없는 불안감에서 형성된다. 타인은 마치 언어처럼 불투명하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는 믿지 못한다. 불안해한다. 그것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보여주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애정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 모든 행위들은 불투명하다. 정확하고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엔 그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랑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나만을 지켜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결국은 타자를 사랑하고 그 모두를 이해하려고 안으려고 했지만 안지 못했다는 것, 그런 사실이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고 우리를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사랑은 그 수치심을 넘어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타자와 합일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을 선사해주는 인연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나? 그것은 “자주” 생기는 일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당신의 불분명함을 모두 껴안아주고 싶은 상대가 생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필연으로 연결되었다는, 단지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당연한 이치처럼. 타자를 이해하고 안아야 가능해지는 사랑이기에 우리는 주체의 선택을 사랑의 도입만큼은 거부하고 싶어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치심을 넘어, 나라는 주체를 죽여, 당신을 사랑하도록 선택하는 것은 분명 내가 하는 일이다. 사랑을 안는 것과 안지 못하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필연도 우연의 값도 아니다. 선택의 값이다.

  

  사랑은 이율배반적인, 치사하고 동시에 상냥한 것의 합이다. 그 참을 수 없는 모순에서 갈등은 생기고 사랑하는 이는 그 사이에서 영원한 방랑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선택에 실패했다.

  결국에 남는 것은 너를 사랑했던, 아니 사랑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한때 너와의 사랑을 꿈꾸었던 나라는 사람뿐이다. 그 사실이 못내 서글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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