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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May 20. 2017

의심, 그리고 사랑.

홍상수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그리고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


 

09. 의심, 그리고 사랑.

-홍상수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그리고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


Louis Jean François Lagrenée, <Psyché surprend l'amour endormi>

  당신, 프시케와 에로스의 사랑을 아는가? 그들이 어떻게 사랑을 시작했고 어떤 시기를 거쳐 어떤 사랑의 완성에 이르렀는지 아는가? 서로의 밤만이 서로를 아는 시간이 되는 시간들, 오로지 그 사랑으로만 사랑을 유지하게 하는 것. 그(에로스)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프시케)은 알지 못한다. 정확히 그가 타인에 의해 어떤 사람으로 규정되는 사람인지, 그러니까 그 사람의 이름, 그 사람의 외모, 지위 등등 그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당신이 알 수 있는 건, 아니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밤의 시간에, 그 사랑에 시간에, 사랑만이 존재하는 시간에 그가 건넨 말들, 그 목소리의 톤, 그리고 그 손에 촉감 그가 건네는 손길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랑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프시케는 그 사랑의 밀어를 믿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불리는 사람인지,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전에 사랑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의심이란 자가 늘 그녀의 사랑에 불안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서야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확신하는 것인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낮에는 어떤 모습을 하는지를 알아야지만 나는 당신과의 사랑을 유지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이 그런 것인가? 사랑의 감정엔 왜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한 수많은 지식이 필요한 걸까? 내가 만든 당신에 대한 인식이 아닌, 낮에 시간들이, (사랑) 밖의 시간들이 만드는 지식들이 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걸까? 왜 프시케는 그가 에로스임을 알고 그 후에 그녀의 의심을 속죄하는가?



홍상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스틸컷

  "당신과 당신 자신의 것", 영화의 끝쯤에 이르러 영수는 민정에게 그들의 공간에 들어와 말한다. 당신이 당신인 것 그것만을 보고 사랑하겠다고. 그 고백 이전의 영수는 당신 자신의 것들이 만들어낸 당신을 믿고, 당신 그 자체를 믿지 못하고 나서 사랑을 잃고 괴로워한다. 영수가 다시 사랑을 되찾게 된 것은 다시 민정을 민정이란 이름으로도 아닌, 그냥 나와의 이 밤과 새벽을 보내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믿고 사랑함을 통해서이다. 다시 그러므로 "진짜" 사랑을 되찾는다.


  나는 당신을 의심한다.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당신을 의심한다. 당신이 내 감정의 동요를 만들기 때문에 당신의 말 하나, 태도 하나, 당신의 숨겨진 시간, 숨겨진 말들, 알 수 없는 것들을 불안해하고 나는 그렇기에 당신을 의심한다. 당신을 어쩌면 "진짜" 사랑하지 못한다.



  일전에 그런 연애를 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에 대한 모든 지식들이 송두리째 거짓이 되며, 모든 사랑의 기억들이 의심에게 좀먹는 그런 연애를 했었다. 그 의심이 사랑의 기억들을 좀먹도록 한 것은 내가 그를 진정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는 그런 기억들로 핑계를 대면서 당신의 낮의 시간들을 의심한다. 그 시간들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을지 의심을 기반으로 한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당신이 보여주는 모습들이 거짓말로 꾸며낸 것들은 아닐까, 모든 것은 그의 연기이지 않을까? 나는 아직 당신 그 자체를,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그 당신이란 사람의 현존재를 사랑하지 못한다.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의 정의를 통해 당신을 사랑하려고 했다. 사랑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러나 당신 그 자체, 지금 내 옆에 있는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 당신의 정의가 아닌 당신의 현존재를 사랑하고 싶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당신이 아니라,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 당신이 아니라,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그 자체를,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


  이 사랑에는 의심이 함께할 수 없다. 필수 불가결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당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기에 의심이 선행돼야 할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든다. 사랑에도 방법적 회의가 필요한 것인 걸까? 당신 그 자체가 아닌 당신 자신의 것으로 형성된, 당신에 대한 나의 인식, 그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부정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세워야 확고부동한 사랑을 얻게 되는 것일까? 당신에 대한 확고부동한 사랑을 그런 과정을 통해 얻어야만 나는 진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싫다. 그래도 나는 의심이란 불안을 지우고 당신을 당신 자체로 사랑하고 싶다. 한 가지의 신화와 한 편의 영화가 당신을 당신 자체를 사랑하고 싶게 만든다. 정말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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