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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서울에 집을 샀다

약 3개월 전에 계약했던 신축빌라의 잔금을 치를 시간이 1시간 후로 다가왔다. 가까운 주민센터에 들려 입주할 집의 등기사항 전부 증명서를 1부 발행했다. 이상은 없겠지만 혹시나 모르는 변동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무인민원발급기 앞에 섰다.


역시나 이상은 없었다. 나의 전 재산을 주고 사는 부동산이었기에 집 자체의 질만큼이나 법적으로 안전한 집을 구하려 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파트와는 조금 다른 시스템으로 집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신축빌라 분양의 현장에서 입주할 집을 계약하기까지 겪었던 고뇌의 과정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입주할 집을 지은 빌라 업체의 계약담당자와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이제 건축주에게 계약금을 제외한 나머지 잔금을 치르면 나는 나의 소유가 될 내 집에 입주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었다. 법무사를 통해 전달한 주택 담보대출 금액을 제외하고도 수억 원의 돈을 건축주에게 보내야 하는 그 순간, 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경제활동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모아 왔던 내 전 재산이 스마트폰 조작, 몇 번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비록 그 돈을 지불하고 나의 집이 생기는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는 허무함을 맞이하며 잔금을 치렀다.    

돈이 건축주의 통장으로 입금되었음을 알리는 스마트폰의 알림 소리와 함께 새집의 전자키와 거실에 설치된 시스템에어컨의 리모컨을 건네받았다.


'드디어 입주구나!'

'이 집을 얻기까지 지난 세월 얼마나 고생했던가!'

'내가 서울 땅에 집을 사다니 …'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우리 집으로 들어왔을 때, 아내와 나는 환호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이제는 월세방이 아닌 우리 집에서 살 수 있었고, 단칸방이 아닌 30평짜리 넓은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지난 3년의 시간을 채워주었던 단칸방 생활이 끝나고 이제는 새집에서 우리 가족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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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서울에서 집을 사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행복주택이나 장기전세주택과 같은 공공임대를 활용하면 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없다면 집의 부피를 줄여서 최소한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혼집을 단칸방으로 얻었고, 작았지만 알콩달콩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공간에서 우리 부부는 3년을 살았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을 하고, 본격적으로 우리가 앞으로 살 집에 대해 알아보면서 우리는 나라가 지원해 주는 주거정책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득 수준으로 철저하게 나누어지는 공공 주택의 지원 조건에서 우리 부부는 커트라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잘 못 벌지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많이 버는 것도 아닌 우리 부부의 소득은 애매하게 커트라인을 벗어나 있었다. 커트라인의 언저리가 아니라, 라인을 완전하게 벗어나 있으면 생각조차 안 들었을 텐데 …, 누릴 수 없는 희망을 품었던 지난 세월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공공주거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우리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임대가 아닌 소유라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었다. 어차피 공공 주택에 임대로 살고 있다고 해도 소득이 높아지면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공공 주택의 수혜자로 계속해서 살고 싶으면 나라가 정해놓은 자격기준에 맞게 자신의 삶을 맞추어 가야 했다. 소득이 더 늘지 않도록 만들거나 자녀를 더 낳아 가구원수를 늘리거나 …

삶이 더 발전하도록 생각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하다니! 싫었다. 그래서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1년 또는 2년마다 이사를 다니기 싫었고, 분쟁이 생기지 않을 좋은 임대인을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힘들게 모은 돈의 가치가 집을 빌렸다는 명목으로 합당한 집세의 범위를 넘어서 남의 배만 채워주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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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가장 먼저 알아본 주택은 아파트였다. 아파트 천지인 대한민국에서 정보를 구하기 가장 쉬운 주택 유형이었다. 대한민국의 부동산 시장이 아파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파트는 부동산의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새로 지은 아파트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청약이라는 것에 당첨되어야 했다. 이미 장기전세와 같은 임대주택에 들어가기 위해 청약통장의 자격은 해당 지역 1순위로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아파트 청약에서는 가점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이제 겨우 2년 조금 넘게 청약통장을 채워온 내가 서울의 아파트를 분양받는 청약에 당첨될 확률은 희박했다.

또 다른 방법인 신혼부부 특별공급이라는 수단도 면밀히 분석해보니 경쟁력이 부족했다. 결혼에 임박했을 때부터 신혼부부 특공을 노렸다면, 그리고 부부의 소득이 높아지기 전에 움직였다면 모를까! 우리 부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관심 있는 지역의 아파트 분양에 대한 입주자 모집공고를 보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아파트 청약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오지 못한 지난날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아파트 청약에 있어서는 시간이 곧 힘이라는 사실을 조금만 빨리 알았어도 선택의 기회가 더 많아졌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 속에서 꽃 피운 생각은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17살 때부터 청약통장을 만들고 매달 10만 원씩 불입하지 못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나는 나의 상황에 맞춰,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서울에서 신축 아파트를 사려면 내 힘만 가지고는 어려웠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 아파트 한 채에 올인하고, 평생을 저당잡힌 삶을 사느니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옮은 판단이었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기만 하면 서울이든, 경기도든 어디에서라도 살겠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른 지역이 아니라 서울, 인서울에서 살고 싶었다. 그것도 지난 3년 동안 살았던 정든 우리 동네에서 계속 살고 싶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로운 동네에서 느꼈던 생활 속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거리를 거닐면 인간 냄새가 잔잔히 풍기는 동네의 향취를 계속해서 느끼며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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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직시하고, 생각을 정리하니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였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이 빌라였다. 수십 년간 가족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잘 지은 신축빌라, 피땀 흘려 모은 내 재산의 가치를 보존해 줄 돈 되는 신축빌라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묵직한 고민이 해결되자 또 다른 고민이 찾아왔다. 그것은 막상 빌라를 구입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빌라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지식을 쌓을 빌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것은 더 큰 문제였다. 아파트와는 다른 형태의 분양 과정을 거치는 데다 직접 분양사무실을 방문하기 전에는 구입할 빌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가 어려운 구조 등은 빌라 구입을 망설이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빌라 구입을 미루거나 접을 수는 없었다. 몇 개월 후면 살고 있는 집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태어난 아이를 안고 이사를 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는 행동해야 했다. 우리 가족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했고, 아이가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빌라를 공부를 했다. 없는 정보였지만 내가 모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끌어모아 빌라라는 세계를 알아갔다. 그리고 목록으로 만들어 두었던 신축빌라들을 주기적으로 임장하며, 내가 구매해도 될만한 집을 선정했다.

공부가 쌓이니 좋은 집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법적으로 최대한 안전하게 소유권을 이전받을 수 있으면서도 가격에 걸맞은 양질의 건축자재를 사용한 집 그리고 개발호재가 확실하며, 수요가 많고 위치가 좋아 향후 현금으로의 환급성이 높은 집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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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둘러 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신축빌라를 알아보기 시작한 이후로 약 5개월의 시간이 흘러 마음에 드는 빌라를 찾고 계약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딸아이가 태어났고, 직장 생활과 함께 갓난아이의 육아도 해야 했기에 집을 보러 다니는 활동을 많이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틈이 나는 데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중심으로 범위를 확장하며, 분양 중이거나 분양 예정인 신축빌라의 현장을 찾았다.

신축빌라는 아파트와는 다르게 현재 어디에 지어졌는지 또는 지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파트처럼 입주자 모집공고를 모아서 볼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없었고, 입주자 모집공고 자체도 없었기 때문에 건설 현장의 위치 등, 매물의 필수 정보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신축빌라는 선택을 위해 필요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으면 직접 몸으로 뛰어야 했다. '분양'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는 신축빌라의 현장을 찾고, 분양사무실에 방문해야만 그 빌라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분양사무실에 방문해서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깔끔한 겉모습과는 달리 못쓰게 생긴 빌라들이 많았다. 불법 증축을 했거나 건물 자체의 완성도는 떨어지는데 시스템에어컨과 같은 옵션을 화려하게 설치해놓고, 소비자를 유혹하는 빌라들이 제법 있었다.  

힘들게 발품을 팔아서 분양을 한다는 신축빌라를 찾았는데 정작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집이 집 같지 않은 허접한 물건들이 많았다. 그런 집들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우울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잘 지은 빌라를 사서 내가 살고 싶은 동네에 계속해서 살고, 우리 가족이 만족스럽게 생활할 수 있는 서울의 빌라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현실이,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희망을 접을 수는 없었다. 단칸방에서 갓난아이를 키우려니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아내와 나, 성인 두 명이 생활하기에도 부족했던 공간에서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씻기려니 빠듯했던 공간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의 공간에서 변화무쌍하게 달라져야만 하는 단칸방을 온몸으로 체험하면 할수록 좋은 빌라로 내 집 마련을 하겠다는 나의 의지는 보다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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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늘은 나의 소망을 져버리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약 2달 정도가 지나자 마음에 쏙 드는 신축빌라를 찾을 수 있었다. 딱 2세대만을 남기고, 전부 분양된 한 동짜리 빌라였다. 그동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허접한 집들을 수도 없이 본 터라 이 집을 본 순간, 단박에 계약해야 할 집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치 진흙탕 속에서 영롱한 보석을 발견한 듯 ~,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짜릿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백만 원을 건축주 통장으로 송금해 가계약을 진행한 후, 3일 정도 지나 정식 계약서를 작성했다. 집은 거실과 주방을 제외하고도 방이 4개, 화장실이 2개가 포함된, 빌라치고는 큰집이었고, 층도 6층 중 3층이었으니 로열층이었다. 집의 위치는 지하철과 버스 등의 대중교통을 지근거리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고, 향후 개발호재까지 확실한 곳이었기에 빌라의 가격은 그 지역에서 상위권에 속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내가 계약한 집은 벌써 팔렸어야 마땅한 집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팔리지 않았을까?', 의문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을 하고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유는 대출에 있었다. 현금부자가 아닌 이상 집을 사려면 대출을 끼고 살 수밖에 없는데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정책이 실시되던 그 시기는 서울에서 대출받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고, 설사 대출이 된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금액을 맞추기 어려운 때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집을 계약하기 전에도 우리 집을 계약했다가 대출이 안 나와 포기한 사람이 있었다. 비록 그의 경우는 개인의 신용 문제 때문에 대출이 막힌 경우였지만 정부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하게 부동산 규제정책을 내놓던 그때의 서울은 분명 집을 사기 어려운 시기였다.

계약 이후, 나도 대출 문제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 무주택, 실수요자이고, 신용등급도 1등급인 맞벌이 가구였지만 소득이 높다는 이유로 한국주택금융공사의 주택 담보대출 상품을 이용할 수 없었다. 소득기준에서 겨우 1 ~ 2백만 원 정도, 많이 번다는 이유로 일반 은행의 대출 상품을 이용해야 했다.

거기에 빌라와 같은 공동주택의 주택 담보대출 승인액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인 감정평가액이 예상보다 적게 나와 부족한 금액을 메우기 위해 다니고 있는 회사의 퇴직금까지 중간정산받아야 했다. 아무리 주택 구입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웬만하면 건들고 싶지 않았던 퇴직금까지 정산받을 때의 심정은 내가 집을 사겠다고 당차게 마음먹었던 결정을 의지와 상관없이 회의하게 됨으로써 불편하고 우울했다.

하필이면 내가 집을 사야 하는 시기가 왜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정책이 실시되는 때였는지, 내가 집을 사려고 하는 동네는 왜 서울 안에 있다는 명목으로 투기과열지구로 분류되어 주택 담보대출을 감정평가액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만 해주는지,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집을 사려고 하는 그즈음, 주변에 변수의 거래가 발생해서 내가 계약한 집의 감정평가액을 끌어내렸는지 …, 나는 지금 집을 꼭 사야 하는데 세상은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힘들긴 해도 집을 못 사는 것은 아니었다. 계약 이후, 일이 진행되지 못하고 막힐 때마다 포기의 유혹에 시달렸지만 분명 장애물을 하나씩 넘어가고 있었다. 단칸방에서의 절박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매 잔금을 맞추기 위해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었고, 생각이 확신으로 바뀔 때마다 불안했던 감정도 안정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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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금일, 은행에서 받은 주택 담보대출금은 잠깐 내 통장에 머물다 순식간에 사라졌고, 고생해 준비한 나머지 잔금은 스마트폰 조작 몇 번에 없어져 버렸다. 내 집을 마련하는 과정은 분명 어려웠는데 선택한 집이 내 것이 되는 과정은 너무 간단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듯 돈을 지불하고, 내 거라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새기면 되는 거였다. 이름을 새기는 것도 돈을 주면 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빌라 업체와 연결된 법무사에게 소유권 이전과 관련된 비용을 지불하면 등기와 세금 납부 등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했다.

그렇게 진짜 내 집이 생겼다. 월세를 지불하고 살았던 지난 3년간의 단칸방 생활도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풀옵션으로 비치된 단칸방의 붙박이 가구와 가전에 만족하며, 짐을 늘리지 않기 위해 물건 하나를 사는 것도 망설였던 3년이었는데 이제는 내 집 안에 내가 선택한 가구와 가전을 내가 꿈꾸던 모습으로 들이게 되었다.

아이방과는 별개로 거실에 아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줄 때는 더없이 기뻤다. 단칸방에서 아이를 낳고 키웠던 고초의 기억이 싹 다 날아가는 듯했다. 내 아이가 마음껏 기고, 걸음마를 시작할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지난날의 어려움은 추억으로 승화되는 것 같았다.

한동안은 내 집으로 이사를 오기는 왔는데 내 집이 아닌듯한 낯섦을 느꼈다. 일상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고, 덧없는 충만감을 집을 통해 느끼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집을 사겠다고 결정하고, 집을 산 결과가 이런 부분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 너무 행복했다.                     


결국, 나는 서울에 집을 샀다. 딸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집을 살 생각을 했을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이 든다. 하지만 단칸방의 신혼생활에서 딸아이의 탄생은 내가 집을 사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부부의 잠자리 가운데에 아이를 누이고, 물끄러미 아이를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마음껏 자기 색깔을 뿜어내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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