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성퀴즈 내주세요
콩이는 뭔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참 오래간다.
그동안 몇달간을 콩순이를 볼 수 있는 주말을 참으로 간절히 기다렸고
나중에는 EBS의 초등생활 매너백서라는 프로그램에 푹 빠졌다.
평일에는 텔레비전이든 컴퓨터든 켜지를 않았으니
콩이는 일요일만을 고대했고, 일요일마다 점심도 건너뛰고 화면에 딱 붙어 있었다.
매일 매너백서 얘기를 하고
매너백서에 나오는 언니, 오빠 이름이 뭐였더라를 늘상 되뇌이고
자면서 잠꼬대로도 매너백서 얘기를 했다.
콩이는 학교에 들어가더니 처음 몇달은 OX 퀴즈를 무척이나 좋아라하다가
나중 몇달은 초성 퀴즈에 빠졌다.
OX 퀴즈를 내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나중에는 그것이 초성 퀴즈로 바뀌었다.
OX 퀴즈고 초성 퀴즈라고 해봐야 내용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할법한 것이다.
일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ㅇ)
비오는 날은 우비를 입는다 (ㅇ)
처음 시작은 이랬다.
콩이는 소근육 발달이 느리고 시지각이 좋지않아서 인지 X표를 잘못했다.
그래서 OX 퀴즈도 X가 될 만한 문제들로 바꾸었다.
9+4=12이다 (ㅅ)
9-5=3이다 (ㅅ)
콩이는 "9 더하기 4는 13이니까 X", "9 빼기 5는 4니까 X" 라고 하며 X표를 마치 ㅅ 처럼 그린다.
X표를 제대로 그리도록 연습시킨다.
콩이는 추상적인 숫자 개념이 약하다.
귤 9개가 귤 5개보다 많은 건 알지만 9가 큰지 5가 큰지는 잘 모른다.
OX 퀴즈를 통하여 한 자리수 덧셈 뺄셈을 무한대로 연습시켜
1+1 부터 9+9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외우는 방식으로 덧셈 뺄셈이 가능하게 되었다.
친구가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으면 기쁘다 (X)
학교에서 교실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은 매너있는 행동이다 (X)
"내가 인사했는데 친구가 안 받으면 슬프니까 X", "교실바닥에 앉는 것은 매너없는 행동이지. X"
이런 OX 퀴즈로 상황별 감정을 외우고, 잘못된 행동을 학습했다.
콩이는 그룹으로 하는 방식으로는 학습이 되지 않고
1:1로는 가능은 하지만 뭔가 책상에 진득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콩이는 제 녀석이 잘한 행동에 대하여 OX 퀴즈를 보상으로 바랬고
특수반 선생님은 한동안 덧셈뺄셈이나 콩이의 학습에 필요한 사항을 간단한 OX 퀴즈로 만들어
하교길에 콩이에게 들려줘야 했다.
OX 퀴즈에 대한 열정이 식어갈 무렵 초성 퀴즈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빠~ 종합장에 초성 퀴즈 내줘!!", "선생님 초성 퀴즈 프린트 해 주세요!"
요즘 콩이가 아주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교실에서 얌전히 있을테니 초성 퀴즈를 내달라고 한다.
양치를 하게 하려면 그 조건으로 초성 퀴즈를 먼저 내줄것을 요구한다.
차를 타고 가다가 수시로 초성 퀴즈를 요구한다.
선생님에게도 매일 초성 퀴즈를 보상으로 받아온다.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은? ㄱㄹ", "다리가 길고 날지 못해요. ㅌㅈ"
처음 시작은 이런 것이었다.
"흥부와 놀부에 나오는 새입니다. ㅈㅂ"
"알리바바에 나오는 똑똑한 하녀 이름. ㅁㄹㅈㅇㄴ"
"인어공주는 사람이 되려고 이것을 빼앗겼어요. ㅁㅅㄹ"
이렇게 동화책에 나오는 내용을 활용하기도 한다.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더니 ㅃㄷㅎㅇ"
"친구가 내 책을 말도 없이 가져가면 ㅎㄱㄴㅇ"
이렇게 감정표현도 연습한다.
콩이는 가방에는 오늘도 초성 퀴즈가 프린트된 종이가 들어있다.
선생님한테 받아온 것일 터이다.
밤에는 초성 퀴즈 100개를 요구하며 양치를 거부하다가 욕실로 끌려들어간다.
잠들기 전에는 토닥토닥 해주며 초성 퀴즈를 내달라고 한다.
이 초성 퀴즈 열풍이 지나가면 뭐에 꽂힐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