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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Aug 11. 2023

유서

김만봉 가출 하루 전     


만봉은 아침을 먹은 후 샤워를 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를 털고 소파에 앉아있는데 설거지를 마친 희수가 옆으로 다가왔다. 머리를 제대로 못 닦은 만봉을 보고 희수는 욕실로 가서 마른 수건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만봉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다시 닦고 손과 발도 꼼꼼히 닦았다.

“우리 아빠 샤워하니까 잘 생겼네.”

“늙은이가 잘생기긴 뭘.”

만봉은 싫지 않은 듯 씩 웃었다.

“아빠 발톱 깎아야겠네. 많이 자랐어.”

“내버려 둬, 내가 나중에 자를게.”

“아냐. 내가 잘라줄게, 기다려 봐.”

희수는 손톱깎이를 찾아서 돌아왔다. 소파 아래 만봉의 발 앞에 앉은 희수는 만봉의 발을 잡고 발톱을 깎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 발톱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자세히 보는 건 처음 같네.”

“노인네 발톱이 다 그렇지 뭐.”

희수는 발톱을 깎고 나서 정성스럽게 발에 로션을 발랐다. 

“아빠!”

“왜?”

“아빠는 행복해?”

“행복?”

“응.”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그냥, 난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 넌 행복하니?”

만봉의 묻는 말에 희수의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침을 삼키며 꾸역꾸역 참았다.

“희수야!”

“응?”

희수가 고개를 들어 만봉을 보았다.

“아빠는 요즘 참 많이 행복하다.”

“진짜야? 왜?”

“그건 음, 내가 지금 몇 살이지?”

“아빠 올해 80살이잖아.”

“80? 참 많이도 먹었구나.”

“뭐가 많아? 요즘은 80도 한창이지.”

“난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야.”

“뭐가?”

“이렇게 80년을 별 탈 없이 잘 살았잖아. 네 엄마를 먼저 보낸 건 마음 아프지만 뭐 그것도 괜찮아, 머지않아 만날 수 있으니까.”

“왜 머지않아 만나? 엄마는 조금 더 있다가 천천히 만나도 돼.”

“난 나보다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나?”

잠시 생각에 빠졌던 희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젊은 게 한숨이 왜 그렇게 길어?”

“내가 그랬어?”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희수야! 사는 것과 죽는 건 친구와 같은 거야.”

“친구?”

“그래, 삶과 죽음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잖아.”

“그런 말이 있어? 정말 멋있는 말이네.”

“그렇지? 그러니 죽는다는 거 별 거 아니야. 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 나면 쉴 수 있는 밤이 기다려지듯이, 평생을 후회 없이 살고 나면 편히 쉴 수 있는 죽음이 기다려지는 법이거든.”

“왜 자꾸 죽는 이야기를 해?”

“네가 지금 아빠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서.”

“아빠는 아직 죽으려면 멀었으니까 난 그런 걱정 안 해.”

“희수야!”

“응?”

희수가 만봉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네 인생을 살아.”

“지금도 내 인생을 살고 있어.”

“아니야, 넌 지금 아내의 인생, 엄마의 인생, 그리고 딸과 며느리의 인생만 살고 있어.”

순간 희수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네 인생,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네 인생을 살아.”

“내 인생이 뭐지?”

“뭐?”

“내 인생을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그것 봐라, 네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게 뭔지도 모르잖니.”

“그런데 사람들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

“누구나 살면서 가족을 위한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지. 하지만 넌 지나쳐.”

“난 잘 모르겠는데.”

“이젠 널 위해 무언가를 해. 항상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말고.”

만봉을 보고 있던 희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아빠 점점 똑똑해지는 것 같아. 아직 죽으려면 멀어서 그런가? 아빠는 백 살은 넘게 살 수 있겠어.”

“어휴! 말만 들어도 지겹다. 백 살이라니.”

만봉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만봉을 보며 싱긋 웃은 희수는 만봉의 깎고 난 발톱을 손에 들고 말했다.

“아빠! 나 마트에 금방 다녀올 테니 잠깐만 혼자 쉬고 있어요.”

“마트는 왜? 냉장고에 먹을 거 많던데.”

“내가 말했잖아 내일이 시어머니 생신이라고, 그래서 장 보러 가는 거야.”

“안사돈 생일이 내일이구나. 그럼 넌 시댁에 가봐야겠구나.”

만봉이 확인하듯 말했다.

“응, 걱정 마! 내일 은수가 휴가를 내서 오기로 했으니까.”

“뭐? 너희들은 아무튼 괜한 짓을 하고 그러냐? 은수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해라!”

갑자기 만봉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왜?”

“난 혼자서도 집에 잘 있는데 왜 바쁜 애를 휴가까지 내서 오게 만들어?”

“괜찮아, 고작 하루일 뿐이야.”

“그 하루가 내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 될 거니까!”

“뭐?”

만봉은 아차 하는 마음에 입을 닫고 리모컨을 돌려댔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수가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 마트로 떠났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만봉은 어린 만봉을 찾았다.

“드디어 내일이야, 가출하는 날!”

“은수가 온다며.”

“희수가 나가고 은수가 오기 전에 떠날 거야.”

“가출해서 어디로 갈 건데?”

“우리 마누라가 있는 곳으로.”

“마누라?”

“그래, 생각만으로도 벌써 설레.”

만봉은 소파에 앉아 발그레해진 얼굴로 히죽거렸다.

“참!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만봉은 일어나서 주방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죽은 후로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들어오지 않던 방이었다.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에는 주인을 잃은 책들이 가득 꽂혀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이 놓여있었다. 

아내는 책을 읽고 뭔가를 끄적이는 걸 좋아했는데 이 마호가니 책상이 갖고 싶다고 오랫동안 졸라댔었다. 이 책상은 당시 만봉이 큰마음을 먹고 거금을 들여 아내에게 사줬던 책상이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아내에게 사준 가장 고가의 물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아내의 물건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만봉은 의자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책상을 쓰다듬었다. 아내가 이곳에 앉아있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만봉은 코끝이 찡해졌고 코끝이 찡해지다 보니 재채기가 나서 연거푸 재채기를 해댔다. 그것이 먼지 때문이라고 생각한 만봉은 수건을 물에 적셔서 꽉 짠 후 책상을 닦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죽은 아내를 추억하듯 정성을 들여 닦아냈다. 그리고 삐그덕 대는 허리를 달래서 쭉 편 후 의자에 다시 앉았다. 

“여보! 이제 당신 외롭지 않게 내가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 아! 당신은 내가 반갑지 않을 수도 있겠군.”

만봉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에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죽어서는 당신을 위해서 살게.”

만봉은 비장한 표정으로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연필꽂이에 있던 펜을 꺼내서 오른손에 꼭 쥐고 텅 빈 편지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한참 편지지를 노려보던 만봉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옛날 조폭들을 때려잡을 때만큼이나 집중력을 발휘해 여러 장의 편지지를 꽉꽉 채워나갔다. 그리고 긴 한숨과 함께 펜을 책상에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읽는 동안 미소도 지었고 눈물도 흘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잘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형사를 하지 말고 작가를 했어야 했나?”

그렇게 완성된 유서를 봉투에 넣고 풀로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그리고 내일 입고 나가기로 결정한 가장 좋아하는 외투 주머니 안쪽에 잘 넣었다. 만봉은 그 외투를 손으로 쓸었다. 

“내일 같이 가자! 잘 부탁한다.”

외투에게 당부하듯 말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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