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둘 Aug 11. 2023

배신감

집으로 돌아온 희수는 캄캄한 집 안에 불을 켰다. 민준은 집에 없었다. 썰렁한 집은 꽤 오랜 시간 보일러를 가동한 적이 없는 듯 냉기가 돌았다. 희수는 서둘러 보일러를 가동했다. 민준에게 전화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수술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 않기로 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희수는 샤워를 하고 서현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민준이 집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수는 넓은 안방보다는 아늑한 서현의 방에서 자고 싶었다.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책상과 책꽂이에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희수는 먼지를 말끔히 닦아내고 침대에 누웠다. 

피곤이 몰려와 어느새 잠이 들었었는지 거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눈을 떴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느라 멍하니 침대에 그대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준의 목소리에 거실로 나오려던 희수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빠 집에 처음 와봐. 이렇게 집으로 같이 퇴근하니까 꼭 내가 오빠 마누라가 된 것 같아.”

“마누라? 마누라는 하나만으로도 벅차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와인 마실래?”

민준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러다가 갑자기 오빠 마누라가 집에 들이닥치면 어떡해?”

“왜? 겁나?”

“아니 전혀! 오히려 스릴 있고 좋은데.”

민준이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아마 당분간은 안 올 거야. 얼마 전에는 장인이 집에 가라고 내쫓았는데도 뭐가 불안한지 다시 처가로 갔더라고.”

“대단한 효녀네. 덕분에 나야 오빠를 차지해서 좋지만.”

“노인네를 요양병원에 보내면 좋으련만 무슨 고집인지 저렇게 혼자 고생하려고 하니.”

“그 여자 은근 미련한 구석이 있나 봐.”

“너무 미련해서 문제지.”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희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기 인생은 살 줄도 모르고 처가 일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저렇게 희생을 하고 있으니.”

“그래서 안쓰러워?”

혜은이 빈정대듯 말했다.

“안쓰럽긴.”

민준이 와인을 잔에 따라서 마시고 숨을 내뱉었다.

“그냥 식상할 뿐이야.”

“식상해?”

“맨날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말투, 뭐 하나 재미있을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야.”

“그 여자 정말 재미없네.”

“그냥 우리 서현이의 엄마, 장인어른의 장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며느리, 그게 다야, 그 여자는.”

“오빠처럼 이렇게 멋있는 남편을 두고 그 여자는 왜 그렇게 따분하게 사는 거야!”

“피곤하다, 우리 같이 씻을까?”

“좋아.”

곧 두 사람은 거실에서 사라졌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희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희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서방 여자 있으니까 신경 쓰라고 하던 만봉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희수는 힘겹게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안방에 있는 욕실 앞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평소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민준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 여자의 숨넘어갈 듯 깔깔대는 소리가 욕실 타일에 부딪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희수는 그 앞에 서서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있던 일상의 끈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장 칼이라도 들고 욕실 안으로 뛰어들 용기조차 없는 자신이 더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희수는 거실로 나와 소파 구석에 있던 자신의 겉옷과 가방을 들고 다시 조용히 서현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칼을 들고 욕실로 뛰어드는 대신 그냥 피하기로 했다. 지금 남아있는 몸속 에너지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두 사람의 끈적한 목소리가 뒤엉켜 안방에서 흘러나왔다. 희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민준에게 여자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더군다나 만봉이 그렇게 경고까지 했음에도.....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새우고 새벽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안방으로 다가가자 엉켜있는 두 사람의 더러운 호흡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희수는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집을 나섰다. 

이른 새벽 도시의 도로는 한산했다. 희수는 차를 몰아 한강변으로 향했다. 강가에 차를 세우고 그대로 멍하니 강을 바라보았다.

‘서현이의 엄마, 장인어른의 장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며느리, 그게 다야, 그 여자는’

민준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렸다. 어디에도 자신의 아내라는 말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민준과 잠자리를  한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빠가 치매 진단을 받기 전, 아니 일 년 전 엄마가 죽기 전,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래전 엄마의 투병 기간 동안 간병하느라 지친 내내 정작 자신은 민준과 살을 맞대고 잠이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게도 기억에는 없었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어제 알았다. 

배신감에 가슴이 아팠지만 생각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희수는 한층 더 무기력해졌고 한층 더 감정이 메말라 갔다. 

‘맨날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말투, 뭐 하나 재미있을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야.’

다시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수는 자동차의 선바이저를 열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아무런 표정이 없는 낯선 여자가 잿빛의 낯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희수는 섬뜩함을 느끼고 서둘러 거울을 닫았다. 자신은 언제부터 이런 표정과 이런 낯빛으로 살고 있었던 걸까. 활짝 웃을 때 필요한 안면근육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웃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웃어지지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강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어두컴컴했던 새벽이 어느새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희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김만봉 가출 5일 전     


“장인어른! 식사하십시오.”

준석이 방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있는 만봉을 깨웠다. 만봉은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버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어제 그분이 아버님 형이 아니라서 그러십니까?”

만봉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건 나였어, 하긴 생각해 보면 형이 이제 와서 나를 보러 올 이유가 없지.”

“형이 아니라도 그분은 옆에 계신 거 아닙니까?”

만봉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없어! 정체가 들통나자 가버린 거야.”

“아무튼 식사하십시오.”

“밥은 먹어서 뭐 하나?”

“밥을 먹어야 살죠.”

“난 곧 죽을 몸이야.”

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먹어야 죽을힘도 나는 거죠.”

그때 희수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 소리에 놀란 준석이 거실로 나갔다.

“처형! 주말 보내고 오시라니까 왜 벌써 오셨습니까?”

“도저히 아빠가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대신 어젯밤에 편히 쉬었으니까 제부는 이제 가보세요.”

“처형 얼굴색이 너무 안 좋습니다.”

준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희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때 준석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준석은 발신인을 확인한 후 놀란 표정으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 모습을 보던 희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딸 없이도 잘 잤어?”

뾰루퉁하던 만봉의 얼굴이 응석을 부리듯 더 뾰루퉁해졌다.

“갔으면 오지 말 것이지 왜 벌써 왔어?”

“아빠 나 없어서 설마 삐진 거야?”

“내가 뭐 그딴 일에 삐지기나 하는 어린 앤 줄 아냐?”

“어휴, 우리 아빠 정말 단단히 삐졌네, 아빠는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안 삐졌다는데도 그러는구나, 잔소리하는 네가 없어서 훨씬 편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오늘 간다고요!”

놀란 두 사람이 토끼눈으로 화장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준석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제부! 무슨 일이에요?”

“죄송합니다. 처형, 저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네, 그러세요. 지난밤에는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장인어른! 저 가보겠습니다.”

준석이 꾸벅 인사를 하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뾰루퉁한 얼굴로 침대에 있던 만봉이 빠른 속도로 침대에서 내려와 준석에게로 갔다. 그리고 희수의 눈치를 살피며 준석의 손에 도장이 든 통장을 쥐어주었다.

“이건 왜 안 가져가나?”

만봉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님!”

“가져 가! 안 그러면 나 정말 화내네.”

준석이 고개를 떨구자 만봉이 다시 희수의 눈치를 살핀 후 말했다.

“빨리 가게! 바쁜 사람이.”

말을 하며 준석의 어깨를 힘껏 밖으로 떠밀었다.  만봉은 가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넘치는 힘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건 특히 현관에서 누군가를 내쫓아야 하는 상황일 때 주로 그랬다. 오늘도 그중 하루였다. 만봉의 힘에 맥없이 밖으로 쫓겨난 준석은 현관 밖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만봉은 뒤를 돌아보며 희수의 눈치를 살핀 후 준석에게로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네, 그리고 내 둘째 사위로 만나서 정말 반가웠네. 잘 살게.”

“아버님!”

준석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런 준석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인 만봉이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는 뭐가 급하다고 사람을 그렇게 내쫓아? 제부 서운하게.”

“볼일 다 봤으면 젊은 사람이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밥 먹자!”     

아침을 먹고 난 희수에게 민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희수는 굳은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뭐 하냐? 전화 안 받고!”

만봉이 멍한 희수에게 말했다. 잠시 더 망설이던 희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잘 지내지? 장인어른은 좀 어떠셔?”

희수는 지난밤 젊은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던 민준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여보! 내 말 안 들려?”

“당신은 어디야?”

“어디긴 병원이지.”

“전화 왜 했어?”

“수요일에 엄마 생신 집에서 하기로 했다며, 장인어른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생신 꼭 내가 준비해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이 마당에 내가 꼭 당신 어머니 생신을 챙겨야 하냐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네가 안 하면 누가 해?”

희수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 나 없이 혼자 지내는 건 어때? 외롭지 않아?”

희수가 물었다. 민준이 수화기 너머로 한숨을 쉬는 게 들렸다.

“외로워도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장인어른 보살피느라 힘든 상황인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잘 알면 이번 어머니 생신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 아냐?”

“희수야! 제발 이러지 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처제한테 하루와 있으라고 하고 당신은 수요일 방배동으로 가.”

“어머님이 치매환자 돌보던 사람한테는 생일상 받기 싫다고 하던데?”

“그건 내가 알아듣게 엄마한테 말 잘했어. 이해해 주실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보!”

“응?”

“나 아빠 간병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들어갈까?”

“갑자기 왜?”

“자기 혼자 지내기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그럼 장인어른은 어쩌고?”

“그냥 요양병원에 보내지 뭐.”

“아냐! 나 때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나도 병원일이 바빠서 생각만큼 집에 못 들어가. 그러니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다른 이유라니?”

희수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아니야, 그럼 수요일에 방배동에서 봐.”

“그래, 고마워.”     


만봉은 밥을 먹은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때 대봉이 침대 발치 아래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왜 아직 거기에 있어?”

만봉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내가 어디로 가버리길 원하는 거야?”

“모르겠어.”

“난 처음부터 널 속인 적이 없어. 네가 착각했을 뿐이라고.”

“그건 알아. 하지만 이제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럼 뭐라고 부를 건데?”

“글쎄, 뭐가 좋을까? 너 내가 맞지?”

“아마도!”

“그럼 만봉이라고 부를게.”

“나야 상관없지만 너는 괜찮겠어?”

“만봉이가 만봉이를 만봉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어때서?”

“그래 그럼 그렇게 불러.”

“만봉아!”

“응?”

늙은 만봉은 문쪽을 흘깃 보며 희수의 눈치를 살폈다.

“희수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어.”

대봉이 아닌 어린 만봉이 말했다.

“나 이제 준비가 끝났어.”

“무슨 준비?”

“죽을 준비!”

“어떻게 할 작정이야?”

“일단 가출을 할 거야!”

“왜?”

만봉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어린 만봉을 보았다.

“네가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사실 수면제를 먹고 쓰러졌을 때 옆에서 누군가 그 모습을 발견하면 병원으로 데려가거든?”

“그래서?”

“그러면 병원에서는 이 사람이 죽기 위해서 수면제를 먹었을 거라는 걸 뻔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멍청하게 위세척이라는 걸 한단 말이야.”

“위세척?”

“응, 먹은 수면제를 다시 씻어내는 거지.”

“왜?”

“죽을까 봐.”

“죽으려고 먹은 거잖아.”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야.”

“생각보다 사람들이 정말 멍청하구나.”

“그래, 그러니 그런 멍청한 사람들 속에서 확실하게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어?”

“몰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늙은 만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하니까 엄마 아버지가 너 어렸을 때 속상했을 만도 해.”

“나는 너야.”

어린 만봉이 발끈하며 말했다.
 “알아! 멍청아!”

“그래서 어떡한다는 거야?”

“집을 나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 수면제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는 거지.”

“그러면?”

“그러면 수면제를 내 위장에서 씻어내기 위해 그 누구도 애쓰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되면 난 안전하게 죽을 수 있는 거지.”

“그렇구나. 그럼 언제 가출을 할 건데?”

“수요일!”

“왜 수요일이야?”

“그날 희수가 집을 비울 거거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