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에 대한 단상
긴 연휴가 끝났다.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연휴 내내 아이들과 붙어 있었다. 분리 수면에 처절히 실패한 나는, 두 아이 사이에서 낑겨 자는 융합 수면을 몇 년째 실행 중이다. 그래서 연휴 전 마지막 하원 시각을 기점으로 거의 160시간 정도를 내리 아이들과 함께했던 것 같다. 고된 행복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한다.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일이 바로 두 아이를 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서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물질을 통틀어 가장 귀여운 것은 우리 집 꼬마 둘이다. 물론 이건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나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무척 사랑한다.
그런데 사랑과는 별개로 육아는 지치지도 않고 나를 지치게 만든다. 몰래 산삼이라도 구워 먹는 것 같은 애들과 함께 있다 보면 말 그대로 기가 빨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꼬마 새들의 지저귐은 딱 3분 정도만 아름답게 느껴진다. 예쁘긴 진짜 예쁜데 음량을 줄일 수 있는 리모컨이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상상한다. 음소거 버튼을 잠깐씩만 누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에 대한 사랑을 주로 엉겨붙음으로써 표현한다. 나 역시 그 보드라운 살갗의 느낌을 좋아하지만, 자의와는 무관하게 신체가 마구 밀고 당겨지는 느낌은 별로다.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가벼운 아이들의 몸짓도 아주 묵직한 철근처럼 무거워진다.
언제나 모두에게 친절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친절을 거침없이 행사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자주 다짐한다. 그런 내가 불친절을 으레 행사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아이들이다. 이 사실을 목도하면서도 딱히 개선할 방도가 없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슬픔과 비참함을 느낀다.
처음에는 친절을 체력이라고만 생각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넘쳐흐르는 여분의 체력에서 친절이 흘러나오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체력이 방전되는 순간에 나오는 불친절에 대해서는 약간의 면죄부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참 뻔뻔하게도, 사면받은 불친절은 활개를 치며 자기 영역을 넓혀 가다가 결국 버릇으로 고착되었다. 모든 버릇은 의식적인 사고 과정을 단축시킨다. 그래서 나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레 말씨, 눈빛, 목소리, 손짓, 표정 등에 묻어난다. 일단 불친절이란 버릇이 생기면 억지로 친절을 이끌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된다.
친절이 자발적으로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다간 살면서 한 두 번도 상냥해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둘 것 같다. 그보다는 능동적으로 건강한 습관을 형성해 보자고 마음을 굳혔다. 친절이란 습관이 불친절의 횡포로부터 나와 타인을 지켜줄 거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