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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건 기질, 예민하게 구는 건 태도

사실은 참지 못했던 거야.

by 누스

나는 내가 소리에 무딘 사람인 줄 알았다. 층간 소음이나 붐비는 장소에서의 웅성거림에 그다지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청각적으로 예민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모든 청각적 자극에 다 민감한 건 아니다. 주로 정서적 정보를 담고 있는 청각 자극, 그중에서도 나와 "관련된" 정서적 정보를 담고 있는 소리에 민감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내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타격감이 다르다. 모르는 사람의 욕설보다 남편의 퉁명스러운 단답이 더 거슬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예민해서 재미가 쏠쏠할 때도 있다. 나는 대화 중에 상대의 언어 속에 감춰진 깊은 의도나 감정의 변화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 둔한 사람이었더라면 놓쳐버리고 말았을 아주 미묘한 단서들을 조합하여 상대의 마음에 대해 추론한다. 수신기가 발달한 덕에 적중률도 높은 편이다. 그렇게 수집한 정보는 심리 평가 보고서에 실리기도 하고, 상담 현장에서 내담자 본인도 몰랐던 마음을 짚어주는 데에 쓰이기도 한다.


전업 작가가 아니면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이 예민함 덕분인 것 같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글감이 될 만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글로 구현해 내는 것 모두 예민함이 열일해 주어서 가능했다.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내 일상은 그저 애들이랑 대충 지지고 볶다가 저무는 무수한 날들에 불과했을 테다.


하지만 예민해서 인생 사는 게 피곤할 때도 무진장 많다. 좀 둔한 엄마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일도 나에게는 거슬리는 건수가 된다. 아이들의 소리에도 쉽게 지치는 것 같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체감상 그러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유아기 연년생 자녀의 육아 현장을 보자.

숨도 안 쉬고 엄마엄마엄마엄마 불러대는 소리 (엄마 닳겠다.)

이거 달라 징징 저거 달라 징징 우는 소리

내 거야! 내가 먼저야! 꺄악! 서로 싸우며 악쓰는 소리

이런 소리들이 시. 시. 각. 각. 귓전을 울린다.


꼭 귀만 혹사당하는 건 아니다. 눈도 못 볼 꼴을 많이 본다. 조용해서 뭐 하나 가봤더니 서로 얼굴에다가 사이좋게 사인펜으로 화장해 준 꼴, 화장품 몰래 가져다가 장난감에 치덕치덕 발라준 꼴.


촉각도 마냥 편치는 않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블록 조각을 밟을 때면 험한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귀에 비하면 눈과 피부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소리는 소리에서 끝나지 않고 소통을 요구하는데, 그 소통이란 게 이 꼬맹이들과 원활하게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불통으로 인해 분위기가 과열되면 달팽이관의 피로감도 극에 달한다. 그럴 땐 아이들이 푸드덕푸드덕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잡음조차 심히 거슬리고, 어쩔 땐 애들을 혼내는 내 목소리에 내가 질려 버리기도 한다. 오죽하면 최후의 순간에 쓰려고 귀마개도 준비해 놨다. 이 새끼손가락 반 만한 주황색 스펀지가 소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마음을 지켜주길 기대하면서. 하 참 예민하다.


심리학에선 예민한 것도 기질이라고 본다. 기질이란 부모님으로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생물학적 요인이니까, 눈동자 색깔처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그냥 그렇게 생긴 거다. 잡음은 이 기질이란 것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기질 별로 합이 잘 맞는 상황이 있고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타고난 성향 덕을 볼 때가 있는가 하면, 암만 노력해도 삐그덕 댈 때가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타고나길 이렇게 생겼으니 삶이 어려운 것도 자기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민하게 태어났으니 예민하게 굴어도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예민한 것과 예민하게 구는 건 다르다. 전자가 타고난 천성이라면 후자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라면서 기질을 잘 다듬어서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하지 못하면, 기질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된다. 그러니 생긴 대로 살고 싶지 않다면 기질을 잘 다스려야 한다. 적어도 서른 넘은 성인이라면 기질 핑계는 대지 말자는 게 개인적인 소견이다.


처음엔 나도 예민한 기질이 문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관찰해 보니, 예민함이 진짜 문제로 불거지는 순간은 대부분 내가 "예민하게 굴 때"였다. 그리고 내가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아무리 거창하게 이 말 저 말 덧붙이며 애써 외면해 봐도 딱 다섯 글자로 정리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바로 "인내심 부족". 결국 난 불편함을 견디고, 거슬리는 걸 무던하게 흘려보내고, 토라지고 싶은 마음을 한 번 더 추스르고, 실망감이 옅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데에 자주 실패하고 있었다. 멋지게 포장해 보고 싶었는데 인내심 부족이라니... 하찮다.


그래도 원인이 심플하니 해결책도 심플하다. 그저 좀 더 참으면 된다. 불편하고 거슬리고 서운한 것들을 좀 더 참아내면, 적어도 예민하게 구는 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자꾸 하다 보면 참는 힘이 길러질 것이고, 인내가 지금보다 수월해질 무렵엔 무작정 참는 것 말고도 해볼 수 있는 멋진 일들이 많아질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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