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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건 연습하면 다 는다.

인격도 연습할 수 있을까?

by 누스

우리 집 막둥이는 3년도 채 못 살아본 것 치고는 말을 잘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말보단 다른 게 앞선다. 특히 자기 딴에 급한 상황에서는 꽥 소리를 지르거나 울어버리곤 한다. 예를 들어 누나가 자기 장난감을 가져가려고 한다거나, 열심히 만든 블록을 떨어뜨려서 산산조각 났을 때 그런다. 주도성이 강해지면서부터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꽥꽥 거리는 게 심해졌다. 하고 싶은 건 많으나 할 줄 아는 건 없고, 성질은 급한데 아직 이걸 다스릴 줄 몰라서 그렇다. 그의 발달 사정이 딱하긴 하나 수시로 데시벨을 높이는 모습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 그래서 두어 달 전부터 집중 훈육에 돌입했다.


그날도 우리 집 꼬마들은 블록을 가지고 놀다가 어김없이 다투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막둥이의 꽥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두 녀석이 서로 엉겨 붙기 직전에 떼어 놓았다. 그러고는 좀 더 살았다고 말귀도 좀 더 알아듣는 첫째에게 먼저 잔소리를 했다. 동생 손에 있는 거 확 뺏어 가면 안 된다, '빌려줘'라고 말하고 기다려야 한다, 또 싸우면 블록 다 치운다.


다음 차례는 장난감도 뺏겼는데 엄마한테 혼나기까지 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꽥꽥이.

"아무리 화나도 소리를 빽 지르면 안 되는 거야. '누나 하지 마' 이렇게 말해봐."

"(울먹이며) 뉴냐 하디마."

"그렇지. 자꾸 연습해야 돼. 소리 지르지 말고 '하지 마.' 이 정도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첫째가 훈수를 곁들인다.

"누나도 연습 많이 했어. 누나도 아가 때 소리 질렀는데 이제 연습 많이 해서 안 질러. 그렇죠 엄마?"

풉. 웃겨 진짜. 너도 얼마 전까지 꽥꽥이었어. 근데 연습 많이 해서 이제 소리 안 지르는 것도 맞아. 기특해.


비록 길다 말할 순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삼십여 년 살면서 몸소 깨달은 삶의 지혜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웬만한 건 연습하면 다 는다는 사실이다. 경험상 실력이 늘지 않는 것들 중 90%는 연습이 부족해서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처음엔 다른 데서 실패의 원인을 찾았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빡세게 구르며 철이 들면서부터는 고작 10%도 안 되는 패인에 매달려 봐야 속만 더 뒤집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하여 엉뚱한 일에 허송세월 보낼 바에야 그냥 묵묵히 연습이나 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습을 많이 해도 안 되면 그때 관두면 된다. 만약 연습할 자신도 없다면, 애초에 잘하길 꿈꿔서도 안 되는 거니까 이 역시 나와는 상관없을 일이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연습이란 게 더 중요해졌다. 갓 태어난 아기를 속싸개로 단단히 감싸 매기, 목욕시키기, 기저귀 갈기, 뭐 하나 손에 익은 게 없었고 그래서 난 연습해야 했다. 아이를 덜 울리면서 미션을 완료하기까지는 여러 번의 실수와 반복과 시간이 필요했다. 몸은 참 정직해서 여러 번 해본 것들은 근육에 저장되었다.


연습은 나만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연습시키는 것도 엄마의 역할이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으로 가져가는 법, 소매를 걷고 비누 거품을 묻혀서 손 씻는 법, 오른쪽 구멍엔 오른발을 넣고 왼쪽 구멍엔 왼발을 넣어서 바지를 잡아 올리는 법.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기술들이 아이들에겐 다 연습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성격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연습이라는 말을 쓰는 게 왠지 어색했다. 성격은 그냥 그렇게 형성되는 거지, 애쓴다고 이게 나아지겠나 싶었다. 어쩐지 연습은 '성취'와 관련된 일에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연습을 빼놓고서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아 본 엄마들은 머지않아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의 인격적 수준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더 무서운 건,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나보다 더 미숙한 아이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연습으로도 안 되는 게 성격이라면, 우린 정말 고작 이렇게 살아야 한다. 나도 나 때문에 사는 게 녹록지 않았는데, 우리 아이들이 나와 같은 고통에 처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러려면 나 역시 더 나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처음에는 지천에 널린 육아 전문가들의 조언에서 희망을 찾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실천은 뒷전이 되고 정보 찾기에만 더 매달리게 되었다. 그럴수록 이상적인 이론과 실망스러운 현실과의 괴리감은 커져만 갔다. 공부법에는 빠삭한데 점수는 1점도 오르지 않는 학생처럼, 다이어트 방법은 알아도 살은 1그람도 빠지지 않는 사람처럼, 정보만으로는 나의 무능력과 무망감이 해결되지 않았다.


도저히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역시 연습밖에 없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상냥하게 말해보는 연습, 훈육할 때 좀 더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는 연습, 아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덤덤히 기다리는 연습. 원리는 간단했다. 좋은 건 한 번 더, 나쁜 건 한 번 덜 하면 된다.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노력에 대한 보상은 더디 왔다. 잘 되다가 안 되는 날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희망은 느낄 수 있었다. 서투른 건 더 연습하면 그만이다. 연습은 더딜지언정 우릴 배신하진 않는다. 몇 개월이 지나서 돌아보면, 처음에 비해 확실히 발전해 있었다. 아이들도 나도 말이다.


인격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운석 같은 게 아니다. 자주 생각하고 자주 내뱉고 자주 행동했던 것들이 조금씩 쌓여서 이루어진, 그래서 반전이라곤 1도 없는 너무 뻔한 결과물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만 해도 내 머릿속엔 참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스쳐갔다. 그중 어떤 것들은 입을 거쳐 말로 튀어나오기도 했고, 손발로 옮겨가서 행동이 되기도 했다. 말과 행동 중 일부는 정성 들여 가공된 최상급 상품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버릇대로 해버린 것들은 불량품에 지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격은 그의 인생이 되고, 더 나아가 다음에 이어질 세대의 인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책임이 무거운 것 치고는 너무 경박하게 사는 것 같다.


다행히도 그 막중한 임무를 오늘 하루에 다 마칠 필요는 없다. 내게 주어진 날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백 년을 살건 백 일을 살건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분량은 딱 오늘 하루치다. 그러니 가볍고 단순하게 오늘 하루치를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말하기 전에 좋은 단어를 골라 보는 연습, 행동에 앞서 생각을 끼워 넣는 연습, 노려보지 말고 비아냥대지 말고 솔직 담백하게 의견을 전하는 연습.


웬만한 건 연습하면 다 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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