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여정
라이킷 30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줌 아웃

2025. 3. 21.

by 한상훈 Mar 21. 2025

만약 당신을 지켜보는 절대자가 있다고 해보자. 절대자는 당신을 어떤 각도에서 보고 있을까. 머리 위 45도 각도에서 당신을 지켜볼까. 아니면 수직 방향에서 볼까. 아니면 맞은편에서 볼까. 아니면 옆 자리에서 볼까. 사실 방향은 중요하지 않다. 절대자가 당신을 봤다면 당신만 보고 있지 않고 줌을 아웃해 다른 사람 또한 줌인해서 볼 것이다. 


줌 아웃된 상태에서,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면 자신은 그렇데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수백 수천 명 중 한 명이고. 수만 수억명중 한 명에 불과하다. 절대자가 나나 당신을 특별히 대우해주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사실 없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라 자신은 신의 계시를 받았고 특별 대우를 받아 주목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세상과 똑같다. 아무리 꾸미고 다녀도 사람들은 대부분 관심 가지지 않고 아무리 관심받으려 애써도 아주 작은 파문을 만들 뿐 잠깐의 파장만 나타났다 사라진다.


고통스러운 순간도 줌 아웃해서 보면 점에 불과해지기도 한다. 내 지난 몇 년은 괴로웠지만 내 어린 시절은 그보다 더 괴로웠다. 그땐 아예 희망도 없었으니 희망의 유무로 세상의 색상이 달라진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줌아웃해서 보면 그저 어린 소년이 겪었던 한 순간의 과거였을 뿐 아무도 그것에 대해 위로해 주거나 애통해주지 않는다. 그 기억을 담고 있는 나 자신만 줌인해서 가까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당신의 고통이나 당신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그렇게 까지 줌인해서 볼 수 없다. 당신이 가진 기억이 우리에겐 없다. 당신이 겪었던 일을 온전히 체감할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큰 고통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누군가가 겪었던 정말 큰 고통도 자신과 무관하면 작게 치부하게 된다.


내가 성경에서 요셉이라는 인물을 삶의 모토로 삼는 이유도 비슷하다. 요셉의 삶은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가 노예가 될만한 잘못을 저질렀는가. 아니다. 그가 감옥에 갈만한 죄를 지었는가. 아니다. 그가 감옥에서 살면서 희망이 꺾이는 순간까지 경험해야 할 만큼 잘못 살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노예에서 죄수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에서 기약 없는 시절을 보내며 젊은 시절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가족에게 버림받았고, 형제들에게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을 뒤로하고 그가 신을 향해서 했던 말이자 형제들에게 했던 말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깨닫게 만든다. "모든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미리 보내셨다." 어린 소년에 불과한 자신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긴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도 모자랄 텐데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결과적으로 지독한 가뭄에서 그의 가족들을 살아남았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기록되었다.


신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간의 고통으로 10년 20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뿌리부터 바뀌기에는 뜻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족히 20년이 소요될지도 모른다. 도대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잘못한 것이 없어도 삶이 추락한다. 세상 모든 이들이 비난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욥기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무언가 잘못했으니 천벌을 받은 것이라 말한다. 욥은 인간의 기준에서는 아무런 흠이 없었다. 가족들이 한날한시에 모조리 죽고, 재산이 모두 강탈당하고 사라져 버리고, 집이 무너져 모든 자식들이 다 사망했음에도 말이다. 


욥기서는 가장 오래된 성경인만큼 가장 신의 본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허무하고 심지어 우리가 겪는 고통들도 신의 기준에서는 짧은 찰나의 순간인 것만 같다. 그러나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겐 그것이 아주 큰 상처이고 쓰라린 고통처럼 느껴진다.


종종 아이들과 놀다 보면 아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은 상처에도 아프다면서 울곤 한다. 사실 어른 입장에서는 그건 엄살인걸 알지만 아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아이는 그것을 실제 하는 고통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엄살이 아닌 진짜 같은 통증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더 이상 보이지도 않는 상처를 가지고 까졌다고 울지 않고,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상처가 나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곤 한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이 겪는 고통은 줌아웃하고 작게 치부하고, 아이가 겪는 작은 아픔에도 줌인해서 크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람은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 사랑의 크기만큼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마치 절대자가 나를 보는 것처럼. 내가 내 안에 갇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 내 위에 누군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제 3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자신을 타자화 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덕목이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갇힌 사람에게는 아무런 자유도 행복도 없다. 자신과 세상을 하나로 여긴다면 자아가 사라지고 자아가 확장된다. 세상이 곧 나고 내가 곧 세상이 된 상태. 부처는 그것을 이미 알았나 보다. 신이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처의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행을 미행하기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