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실감각이 살아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말도 글도 영화도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것을 접하면 쉽게 집중하지 못하고 만다. 덕분에 이렇다 할 장기적인 목표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 허황된 미래를 꿈꾸는 횟수도 극히 적다. 이런 성향들은 삶의 많은 구석에서 묻어나게 마련이고, 가끔은 상상력이라고는 1도 없는 내가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싶어 질 때도 있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일을 잘했으며, 그래서인지 연차가 쌓일수록 기한이 정해져 있는 시급한 업무들을 담당할 일이 많았다. 이는 곧 사무실에서 허투루 쓸 시간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며, 생각하는 것보다는 행동함이 보다 빠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비법이었다. 결국 사무실에서 오롯이 내 일만 하다 보면 업무시간이 훌쩍 지났고, 선배나 후배, 동료들과는 식사시간에 나누는 대화가 거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일정 연차가 쌓이고 나면 후배(대부분 신입사원이다)가 들어오게 마련인데, 이를 받아들이는 두 부류가 있다. 한쪽은 이제 내 일을 나눠서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휴~언제 가르쳐서 언제 일을 나누고... 라며 앞선 걱정을 내뱉는다. 나는 후자 쪽이었고, 속된 말로 내 맘 같은 신입은 거의 본 적이 없으므로, 내 업무시간을 쪼개어 알려주고 소위 키워야 하는 과제를 덤으로 얻게 되는 셈이었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후배였을텐데, 태어날 때부터 나는 개구리였던 마냥 오만하게 올챙이 시절은 싹 잊고 있었다.
일정 기간 인턴기간을 거치고 정직원으로 입사하게 되는 요즘의 취업 루트에 따라 내게도 인턴 한 명이 배정된 때가 있었고, 그들은 업무와 정규직 선발 테스트를 오가며 힘겨운 사회생활을 배우던 중이었다. 성격 탓하는 게 가장 비겁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타고난 성격 탓에 사무실에서 오가는 나의 말투는 극도로 사무적이다. 이런 내가 후배에게 다가가기 쉽게 보였을 리 없고, 나 역시 인턴이라고 대충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비빌 언덕은 동기 아니면 직속 선배가 전부였을 것이므로, 검토하거나 의견이 필요한 문서들은 꼼꼼하게 피드백을 주려 노력했다.
그런 건조한 시간을 지나 내 후배는 정규직으로 합격했고, 그간 마음고생 몸고생을 곁에서 봐 왔던 나는 그날만큼은 축하를 꼭 전하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했다. 이러저러한 축하의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 후배 왈 "00 선임님, 앞으로 제가 잘하겠습니다. 도와주신 것들 제가 다 보답하겠습니다." 헌데 그 말을 들은 내가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00 씨, 저한테 잘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또 들어올 00의 후배들한테 지금 그 마음 그대로 잘해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스스로 대답을 하고서도 조금 놀랐다. 나는 저런 마음이 없는 줄 알고 살았는데, 후배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니 나 말고 너의 후배에게 잘해주어라 따위의 대답을 내가 할 거라고 감히 상상도 못 했었다. 하지만 저 말은 진심이었고, 나는 그가 그의 후배에게 그렇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 지금 우리가 몸담은 작은 조직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힘을 하나라도 더 얻을 것 아닌가 라는 허구의 꿈을 마음속에 담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 개인이 주도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한 그 용기 자체는 응원하지만, 그 힘은 너무도 작아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며 살던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가진 작지만 큰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장의 현실에서 내가 놓은 이 작은 돌 하나가 지금은 물을 건너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저 돌멩이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런 돌을 자주 자꾸 놓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 징검다리로 물을 건너게 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희미하게나마 믿게 되었다. 그리고 미처 나는 몰랐지만 마음속으로 내가 몸담은 이 곳이 조금이라도 잘됐으면 하는 바램을 오래도록 품고 있었다.
좀 잘 됐으면 좋겠다 라는 내 마음이 미치는 영역은 아직 좁디좁고,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서 나의 일상의 색깔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사무실에서는 표정이 적고 건조한 편이다. 하지만 저 마음이 오래 지나 후일에 나를 비추는 어떤 색깔의 일 부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가 되면 날 선 시선보다는, 곱고 따스한 무언가가 내게서 묻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에도 이맘때의 내 마음을 내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