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쯤.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가 얼굴까지 타올라, 잠을 깨웠다.
아침잠이 많던 내가,
이 일 이후로는 새벽마다 분노에 깨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화병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어느 날은 분통이 너무 터져
가슴을 미친 듯이 치며 울음을 쏟아냈다.
그러다 지쳐 잠들고,
다시 깨서 또 다른 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통과했다.
두 번째 창업.
공동창업자들에게 뒷통수를 맞았다는 생각에,
나는 한동안 분노와 좌절 속에서 살았다.
첫 번째 동업은 괜찮았다.
계약서도, 도리도 지킨 좋은 파트너 덕분에
웃는 얼굴로 서로를 응원하며 마무리했다.
문제는 두 번째였다.
첫 창업에서 2년 남짓,
정부지원사업을 따내고, 콘텐츠를 만들며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의 즐거움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만큼 결핍도 커졌다.
사업 아이템은 내가 처음 구상한 게 아니었기에
아이디어의 뿌리를 깊이 고민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함께하던 창업 파트너는 본업이 따로 있었고,
나는 실질적인 운영을 혼자 맡았다.
그렇다고 내가 CEO로서의 역량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팀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첫 번째 사업 아이템을 홍보하기 위해
참가한 박람회에서
두 번째 창업의 인연을 만났다.
“요즘 마케팅 파트너를 찾고 있어요.”
“저도 IT 마케팅 툴 회사를 하고 있어요.
한번 같이 얘기해볼까요?”
그렇게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하게 됐다.
개발자이자 디자이너 출신 대표,
개발자 한 명, 기획자 한 명.
총 세 명이었다.
그들과의 첫 대화는 이상할 만큼 편했다.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이들과 함께라면
무슨 서비스든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배울 점이 많았다.
빠른 실행력, 논리적인 사고, 실리콘밸리 성장론까지.
아이디어를 베타버전으로 구현해내는
속도는 놀라웠다.
그렇게 두세 달을 오가며 회의를 하던 끝에
나는 공동창업자이자 마케터로 합류하게 됐다.
지분은 4분의 1씩,
수익도 동등하게 나누기로 했다.
처음엔 모든 게 즐거웠다.
아이디어를 내고, 서비스를 만들고,
밤늦게까지 회의하는 일조차도.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0시가 넘어 퇴근했지만,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정기적인 월급을 받진 못해도,
가끔 외주를 해
100만 원이라도 받는 달에는 뿌듯했다.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시간 자체가
나에겐 배움이고, 설렘이었다.
하지만,
의도가 좋다고 결과가 좋은 건 아니었다.
2년 반쯤이 흘렀을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한계와
그들과 함께하는 관계의 한계를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그때의 고통 속에서
나는 커리어 원칙 세 가지를 세웠다.
생활이 유지되어야 열정도 식지 않는다.
그때는 고정비를 아끼겠다며
4대보험조차 들지 않았다.
나중에 회사로 이직하려 할 때
경력 증빙조차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무엇보다 적더라도 매달 급여가 있어야
기본 생활활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팀은 아이디어를 내고
빠르게 실행하는 능력은 있었지만,
정작 ‘고객이 돈을 낼 가치’를
만드는 일에는 서툴렀다.
대표는 개발과 디자인을 모두 해낼 만큼
희소한 인재였지만,
경영자로서의 혜안은 부족했다.
나 역시 마케팅을 한다고 했지만,
그건 전략이 아닌 ‘감각’에 가까웠다.
결국, 우리의 성장은 우리 수준만큼에 머물렀다.
어느 날, 작은 행운이 찾아왔다.
정부로부터 초기 투자(Seed)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됐다.
투자자들은 ‘대표가 대주주인 회사’를 선호했다.
책임이 한 곳으로 모여야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대표에게 지분을 몰아주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직함만 ‘대표’가 아니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대표처럼 일했다.
기관 외주를 따오고, 사무실을 구하고,
사업이 버틸 수 있게 모든 일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분에 대한 이야기를 구두로 합의만 했지,
정식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의결권을 잃었다.
대표는 대주주가 되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알았다.
계약은 사람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지키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걸.
그 이후,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투자를 받던 바로 그 순간,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팀워크는 산산이 무너졌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순진했다.
‘우정’이라는 단어를 너무 믿었다.
그 믿음이 무너졌을 때의 배신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단 한 번의 일로 멀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시련과 실연이 동시에 찾아오면서
인생의 바닥을 지나고 있었다.
모은 돈도 없었고,
내세울 커리어도 없었고,
나이는 더 들었고,
연애도 끝났다.
취업시장에 다시 내던져졌을 때,
그나마 있던
젊음이라는 무기도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모든 건 다 지나갔다.
때로는 버티고,
때로는 부서지고,
때로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아주 작은 틈이 보였다.
그 틈새로 들어가 보니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