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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Jul 19. 2024

[근황업데이트] '퍼펙트 데이즈'를 살아 냅니다

유전자 수치를 받아 들고서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제법 반향을 일으키는 모양입니다. '완벽한 날들'이란 누군가의 '특별한 날들'일 수도, 어떤 이에게는 '고만 고만한 날들'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완벽한 날'은 범인들의 인생 속에는 조우할 수 없는 신기루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렇고 그런 비루하지만 단단한 시간들이 모여 일상을 이루고 그 고단하지만 소중한 날들이 모여 완벽한 평온을 주는지도 모르지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


저는 매주 남의 피를 얻어 살아 내고 있습니다. 혈소판이 바닥이라 잠결에 눌린 손목이 멍이 깊고 넓게 들고, 빈혈로 박동성 이명과 비문증에 가까운 좁아드는 시야로 어지러움을 달고 살아갑니다. 아직 호중구는 하한치에 턱걸이되어 격리 입원은 피하고 있습니다. 이를 감수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골수내 암세포를 죽이고 건강한 조혈작용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를 위해 혈액 세포 유전자 검사를 진행합니다.


'기적의 탄환'이라는 표적 항암제의 개발과 3,4세대에 이르는 진보를 통해 제가 앓고 있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은 '관리 가능한' 수준의 병증이 되었습니다. 동병 환우 커뮤니티를 살펴보더라도 초기 수개월에서 일 년 정도면 일상을 되찾더군요. 보통 발병 진단 처음부터 3개월 이내에 암세포 유전자 측정 지표가 40%대에서 10% 미만으로 떨어 뜨리는 것을 치료 목적지표로 삼습니다. 반 년이면 빌로우 컴마인 0.XXX%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처음 3개월 차에 18%에 머물러 1차 약제 실패 진단되어 약을 바꾸어 최고 용량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부작용 중 혈액 반응이 심해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모두 하한보다 한참 밑에 있으니, 그야말로 고위험군 가속기 환자로 버티고 있습니다. 처음 발병 진단이 늦었습니다. 골수 생검 결과 섬유화가 많이 진행되어 조혈 환경이 척박해진 것이 문제라고 주치의 선생이 이야기합니다. 척박해진 환경이 개선되기는 어렵고, 남아 있는 여력이 최선을 다해 주기를 기대하며 버티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약제를 바꾸고 두 번째 유전자 검사 결과가 병원 어플에 업데이트되었더군요. 지난번에 14.6%로 소폭 하락되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기대와 달리 16.1%로 다시 암수치가 올랐습니다. 약제 교체로 리셋이 되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한 달 뒤에 10% 미만으로 떨어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MBTI 식으로 말하자면 특대문자 T인 성향이 고마운 지금입니다. 실망은 엄청 무겁지만, 기대는 더 무겁게 여기기에 좀처럼 둘러메지 않기로 한지 오래라 다행입니다.


수혈 준비 중


저에게 <퍼펙트 데이즈>는 역설적으로 요즘,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 세끼를 시간 어김없이 소박하게 먹어 냅니다. 요일마다 찾아오는 드라마도 챙겨보고 일상 같은 야구도 매일 중계를 본방 사수합니다. 응원팀의 헛스윙에 욕 짓거리 내뱉기도 하고, 뜻밖의 역전 홈런에 벌떡 일어나 물개 박수를 보냅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잠을 청하고 비슷한 아침에 하루를 맞습니다.


특히 매주 화요일이면 아내와 함께 조금 서둘러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섭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위한 채혈을 하고 키와 몸무게를 잽니다. 진료까지 한 시간 남짓 남은 시간에 아내가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 와 아몬드 쿠키와 함께 제 앞에 놓고 마주 앉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는 초기 알고리즘처럼 나눕니다. 한참 지난 옛날이야기, 요즘 뉴스 이야기, 그리고 알 수 없지만 뻔할 것 같은 날씨 이야기.


저에게 <퍼펙트 데이즈>는 매주 화요일일지도 모릅니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지만, 결국 살아내어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그런 평범한 날. 진료를 보고 수혈을 받고 아내는 불편한 병원 의자에서 절 기다립니다.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 역에서 하나에 천 원짜리 빵을 저녁거리로 3일 치 사고, 가끔 슈퍼에 들려 찬거리를 마련하는 그런 날이 제게는 '완벽한 날들'일지도 모릅니다.


살아 내는 흰소리가 길었습니다. 이겨내어 잘 살아 내고 싶습니다. 한 달 후 혹여나 2차 실패가 되더라도 두서너 가지의 대안이 남아 있음에 감사해 봅니다.


<항암 비용 모금 중>

SC제일은행 22320191759 박철웅

하나은행 10291039413107 김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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