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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차니피디 Nov 01. 2020

경주 월성 둘레길

가족 둘레길 걷기 프로젝트 No.5

 

“아빠, 제 이름이 왜 여기 있어요?”


몇 해 전 경주에 처음 왔을 때 첫째 유신이가 물었다. 그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같은 이름을 따랐다고 알려줬다. 아이는 김유신 장군묘 이정표를 보고도 한마디 했다. “나 아직 일곱 살인데 벌써 무덤도 있네요.”     


 십사 년 전 결혼을 하고 신혼의 행복을 누릴 겨를도 없이 낯선 폴란드로 날아갔다. 회사가 유럽에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임무를 나에게 주었다. 공장을 완공하고 제품을 생산하느라 밤낮 없는 2년을 보내니 한국이 그리웠다. 그러다 아내와 같이 드라마 선덕여왕의 재미에 빠졌었다. 얼마 후 아내는 첫째 출산을 한 달 앞두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아이 이름을 쓴 종이를 쥐여줬다. 한국에 도착한 아내가 전화했다. “꼭 김유신으로 지어야 해?” 유럽에서 살면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받을 일은 없지 않냐고 설득했다. 아내도 못 이긴 척 동의했다. 누구나 해외에 살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더니 나는 드라마를 보다가 애국을 하게 될 줄이야.    

  

 바쁘기만 했던 유럽 생활은 7년 만에 끝이 났다. 두 아들을 혼자 키우던 아내는 서울 생활이 어려운 몸이 되었다. 운명처럼 우리 가족은 아무 연고도 없는 경주 옆 포항에 정착했다. 이듬해 봄 경주 벚꽃길을 걸으며 유신은 자신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놀림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8월의 이른 아침, 경주 월성에 도착했다. 백일홍 사이로 나지막이 서 있는 국보 31호 첨성대는 신라가 빚은 천문관측대다. 원기둥의 돌은 27단으로 27대 선덕여왕을 상징한다. 전체는 30단으로 한 달을 뜻하고 사용된 돌은 362개로 음력 1년의 날과 같다. 3년 전 경주 지진 피해로 모서리가 벌어지고 약간 기울어졌지만 1300년 넘게 굳건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첨성대 앞으로 뻗은 길을 걸어가면 옛 궁궐터 같은 대형 건물지가 있고 뒤로는 내물왕릉이 보인다. 이어지는 숲은 경주 김 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간직한 계림(鷄林)이다. 숲에 들어서니 발걸음마다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천년 고목이 안개를 뿜어내는 듯 신비롭다. 어디선가 화랑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화랑을 흠모하는 여인이 저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내 발걸음도 아이와 아내 앞에서 씩씩해졌다. 아빠도 한때 화랑이라 불렸던 사관생도였으니까.      


 계림의 끝자락에는 전통한옥으로 이루어진 경주향교와 교촌마을이 있다. 독립유공자 최준 선생의 가문인 경주 최부자댁으로 이름난 마을. 최부자 가문은 12대에 걸쳐 영남의 대지주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상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며 일제에 항거했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에 모든 재산을 기증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였다.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또 다른 독립유공자 최완 선생의 생가를 볼 수 있었다. 최준 선생의 동생이고 부자였음에도 낮은 대문에 작은 집을 보면서 얼마나 검소했는지 짐작되었다.     


 교촌마을 앞에는 남천이 흐르고 궁궐처럼 화려한 월정교가 있다. 깨끗한 냇물은 월정교의 아름다움을 거울처럼 비춘다. 기록에는 원효대사가 기림사를 출발해 골굴사와 분황사를 거쳐 월정교에 이르러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를 만나 사랑을 했고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건넜다는 유교(楡橋) 터는 보이지 않지만, 신라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교촌 역사를 떠올리며 아이의 손을 잡고 돌다리를 건넜다.     

 월성 숲을 끼고 흐르는 남천을 따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어진 둘레길에는 백일홍이 활짝 피었다. 아침이지만 여름 햇살은 눈 부셨고 따가웠다. 지나던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며 어린 유신에게 응원의 손길을 보냈다. 박물관 사거리를 지나 동궁과 월지 앞에 도착했다. 나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땀을 식혔다. 코스모스 들판 뒤에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 간판이 보였다.      


“아빠, 오늘은 김유신 장군과 선덕여왕을 만난 것 같아요.”

“그렇구나. 유신이가 천년의 시간여행을 다녀왔네.”

꽃밭을 따라 다시 첨성대가 보였다.      




 영웅들은 이 땅에 나라를 세우고 통일을 이뤘으며 백성과 함께 번영의 문화를 남겼다. 아이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따라 걸으며 역사의 흔적과 문화의 파편 사이를 상상력으로 채웠다. 학교 밖으로 나와 마을마다 전해오는 전설을 찾아가는 둘레길 여행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아이에게 영감을 주는 자극제이다. 가족이 함께 걷는 둘레길은 행복을 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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