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남 대결
루틴남A는 오후 5시 반 전후로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저녁 메뉴는 대체로 전날 저녁에 정해두어, 준비된 재료를 꺼내 요리하기만 하면 된다.
루틴남B는 그 시간에 티비를 즐긴다.
넷플릭스에서 만화 두 편을 시청하면 오후 6시가 될 것이다.
루틴남A는 메인 요리가 오후 6시에 완성되도록 시간 조절을 한다.
쌀밥은 압력밥솥에 40분 전에 올리고,
된장찌개는 20분 전에, 삼겹살은 10분 전에 조리를 시작한다.
루틴남B는 볼 것이 끝나면 스스로 티비를 끄고 식탁으로 다가온다.
루틴남A가 삼겹살이 오를 자리만 남겨두고 모든 세팅을 완료한 상태다.
모두 자리에 앉으면 삼겹살이 완성되어 상 가운데 올려진다.
루틴남A는 밥을 먹고는 바로 상을 치운다.
루틴남B는 그 사이 티타임 간식을 준비한다.
서로 먹고 싶었던 간식을 묻고, 그것들로 식탁을 다시 채운다.
편식하지 않고 저녁밥을 잘 먹었을 때만 허용되는 자유간식시간.
루틴남A는 커피, 루틴남B는 요거트를 선택한다.
공용 간식인 감자칩은 덤이다.
오후 7시.
날씨를 확인하고 산책에 나선다.
그날 각자의 컨디션을 고려해서 탈 것(유모차, 자전거, 씽씽카 등)을 셀렉하고,
오늘은 누구 스타일대로 산책길을 선택할지 논의한다.
루틴남A는 아이들이 탈 것에서 내리지 않는 산책을 선호한다.
루틴남B는 중간에 뛰어놀 수 있는 코스가 있는 산책을 좋아한다.
저녁 산책을 마치면 아이들을 씻긴다.
루틴남A는 물을 받아 아기를 씻기고, 분유를 먹인다.
그 사이 내가 루틴남B를 데리고 들어가 씻긴다.
다 씻고 난 후에는 나는 둘째 트림을 시키면서 동시에 루틴남B의 일정에 맞게 ‘싸우기 놀이‘를 진행한다.
루틴남A는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던 집안일을 시작한다.
청소기 돌리기, 잠자리 점검, 분리수거, 쓰레기 내보내기, 젖병 설거지,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20분이면 가능하다.
오후 8시 40분.
루틴남A는 아기를 재운다.
등을 두드리며 혹시 남았을 마지막 트림을 내보내고, 어둠에 적응하도록 함께 있어준다.
루틴남B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 다섯 권을 추린다.
읽어보니 재밌었던 세 권과 처음 읽는 두 권으로 조합한다.
루틴남A는 아기를 재우고는 본인 혼자만의 시간을 시작한다.
루틴남B는 책을 다 읽고 눈이 반쯤 감긴 상태인데도, 본인만의 수면의식을 차례로 실행한다.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갔다가, 치카 사탕(자일리톨, 양치 후 먹는 사탕)을 입에 물고 잠자리에 눕는다.
루틴남A는 B가 빨리 잤으면 하는 마음에 못마땅하게 지켜보지만 같은 루틴남으로서 그를 존중해 준다.
치열했던 그들의 대결에 오늘도 박수를 보낸다.
루틴남과의 연애는 쉽지 않았다.
그는 '토요일에는 만나지 말자' 했다.
일주일 중 하루는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소속된 축구팀에 가야 하기도 했고,
혼자 책을 읽을 시간도 필요했다.
그가 그렇다면 다른 날 만나면 그만이지만
그 이유가 '널 그만큼 사랑하지 않아'로 들렸고, 그 이유들에 지고 싶지 않았다.
괜히 심술을 부려 축구에 못 가게 하거나
혼자만의 힐링시간을 강제로 카페에서 같이 보내게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감정기복이 없다'던 그가 우울해지고 말라갔다.
일부러 그런 척한 것이라면 괘씸이라도 할 텐데
정작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 이후 ‘절대 지켜‘ 모드로 돌입했다.
토요일이면 축구는 무조건 필참 하도록 하고, 연락도 자제했다.
그랬더니 그가 변했다.
축구 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보러 오기 시작하더니,
그의 요청과 반대로 토요일 고정 데이트가 생겨났다.
청개구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루티너들은 상대방이 의도했든 안 했든
누군가에 의해 본인의 루틴이 깨지면 굉장히 괴로워한다.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찜찜함과 분노, 무기력과 우울, 실패감과 무가치감, 죄책감과 자책, 그 사이의 무언가를 느낀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루틴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쓴다. (이런 자들이 루티너들이다.)
그 과정 상 본인의 일정을 우선으로 하는 모습에서 '이기적이다' 평가받기도 한다.
그들은 오해받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해야 하는 것을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이 1순위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는 그들은 스스로 루틴을 수정하거나 재설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이는 그렇게 평화를 지켜냈고,
지금도 그렇게 지켜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