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PART-마지막> #증후 ⑩
랄라는 A동 현관 앞에 서서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마주보이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사이로 하얀 로프에 매달린 펼침막이 잔잔한 바람 속에서 파르르 떨며 나부대고 있었다. 펼침막에는 <어용노조 창의테크밸리유니온의 민주노조 파괴공작을 규탄한다!>는 M노총 일반노조 창의테크밸리분회의 구호가 적혔다. 펼침막들은 주로 A동 주변으로 걸렸고 정문 앞에만 3개의 펼침막이 연달아 내걸렸다. 이에는, 사용자측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비자주적 어용노조, 창의테크밸리유니온이 창립을 앞두고 노동자들의 자발적 결사체인 민주노조의 조합원들을 빼가고 있으며 이는 전형적인 노조 파괴 수법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거무죽죽하면서 뻘겋기도 한, 두 가지의 글자색이 대비를 이루는 이 펼침막은 어느 새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며칠째 펄럭대고 있었지만 만든 이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데는 번번히 실패하고 있었다. 엄혹한 시절의 사회운동 경력이 존중되는 이곳에서도 구호는 철저히 묵살되고 외면당했다. 사람들은 이 펼침막들 사이로 유유히 걸으며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단풍을 열심히 즐겼다. 그들의 밝은 표정 위로 핏빛을 연상케 하는 이 결연한 문구들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흔들렸다. 겨울로 수렴되고 있는 계절의 풍경이 처연했다. 센터장 C의 취임 8개월차였다. 랄라는 퇴근 후 지역노동조합 운동의 정책 브레인으로 알려진 선배 김지양을 만나러 나가는 길이었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M노총 일반노조 창의테크밸리 분회의 사용자가 된 센터장 C는 취임 초기 센터의 중장기 발전방향을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 문짱으로부터 미화, 보안, 설비 등의 시설관리 부문을 시 산하의 시설관리공단으로 업무위임하겠다는 계획을 전달 받고 쾌재를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시설관리 업무 수행이력이 전무한 센터의 위탁법인인 ‘씽’에서 애초에 감당가능한 업무도 아니었다. 취임 두 달이 지난 후 센터장 C는 하반기부터 정기적 노사테이블을 열어 센터 운영 전반을 노사와 함께 협의하겠다고 센터직원들에게 알렸다. 센터장 C는 스스로 꽤 노동친화적인 사용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있는 곳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진리가 자신에게만은 비껴선 것처럼. 그러나 랄라는 그의 그 포부 자체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했다. 노사테이블의 협상당사자 중 한 측인 사용자가 꼭 그 판의 존립기반을 손에 틀어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는 노사테이블을 협상의 의무적 참여자 중 한 측으로써 제안하는 형태를 띄지 않고 테이블을 열겠다고 통지하고 있었다. A동 2층의 사무직 직원들이 2층 라운지 골방에 여직원휴게실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자 센터장 C가 변변찮은 미화여사님들의 휴게공간을 바꿔달라고 그들이 요청하지 않는 것에 사무직원들의 이기 라고 분개했을 때, 랄라는 그가 자신을 친노동자적 사용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미화여사님들의 휴게공간을 왜 여타의 다른 노동자들이 요청을 해야하는가. 그들이 필요하다면 그들이 요청할 것이었다. 지식노동자의 단단한 착각, 학습되지 않은 노동자의 주체성에 대한 불신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경험과 실천에 근거하지 않고 그저 관념적 확신으로 꽉 차있는 그에게 실패란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센터장 C는 또, 워크숍이라는 이름을 달고 한 달에 한 번 A동 2층의 사무직 직원들과 시설관리직 직원들이 함께 점심을 먹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운영하라고 경영지원실에 지시했다. 워크샵을 가장한 첫 점심식사는 초여름을 재촉하는 늦 봄의 어느 날 언플러그드라운지에서 진행되었다. 메뉴는 입주기관 중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서 마련한 베트남식 쌀국수였다. 그리고 그 점심식사가 끝난 후 전직원이 동원되는 한바탕 야외마당 대청소가 있었다. 이날 이후 이 전체 워크숍은 두차례나 더 진행되었고 메뉴는 백숙 또는 한정식도시락 같은 것이었다. 이 워크숍이 결국 흐지부지 된 데에는 정작 센터장 C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젊은 직원들의 의무감이 재미와 필요로 전환되지 못한 탓이 컸다. 워크숍은 점심식사 외 별 것이 없었고 어디서 빌려온 것인지 노래방기기가 내내 있었으며 자연스레 마이크를 잡고 흥을 돋우려는 누군가의 눈물 나는 노력과 불행하게도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직원이 하나둘 생겨났다. 보통 흥에 장단을 맞추는 쪽은 시설관리직 직원들이었다. 이들이 언플러그드라운지 1층에서 때아닌 유흥을 즐기는 동안 A동 2층에서 사무를 보는 직원들, 그 중에서도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여성 직원들은 언플러그드하우스 2층 다락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꼴이 되었는데 그렇게 워크숍은 그 취지가 무색하게 한데 모이지 못하고 1,2층으로 점차 분리되는 듯 싶더니 세 번째만에 결국 워크숍 장소의 구석으로 몰리던 직원들이 전원 불참하며 일단락되었다. 센터에서 비교적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이들이 이 공짜 식사의 특전마저 마다한데는 이 워크숍 자리에서 A동 2층 사무실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남성직원인 여진과 시설관리분회 분회장이기도 한 미사여사님이 노래방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에 맞춰 블루스를 추는 장면을 보게 된 영향이 컸다고 알려졌다. 센터장 C가 시설관리부문을 공단으로 넘기려는 인계서 작성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 일은 센터장 C의 생각처럼 그리 순탄치 않았다. 센터장 C가 만든 이 노사테이블의 노조측 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분회장과 시설관리단 단장이 찬반투표 결과 조합원 대다수가 찬성한 공단 업무 위임의 건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밝히고 나선 것이었다. 이를 두고, 필수노동자이지만 2,3년 단위로 단기로 계약하는 민간위탁과 같이 불안정한 노동환경에 놓인 조합원들은 공단의 정규직 고용승계를 조건으로 찬성표를 던진데 반해 노동조합의 지도부와 시설관리단 단장은 자신들 보다 조직력이 앞서는 공단의 노동조합으로 편입되어 자신들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민주적 거수투표 결과까지 뒤엎고 반대표를 던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두번째 협상테이블만에 노조의 반대에 부딪힌 센터장 C가 그야말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소문도 함께 였다. 랄라는 그 장면이 눈에 선 했다. 마음에 안드는 것에 그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자주 불뚝거렸고 대체로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예민한 랄라에 촉수에는 자주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두 번의 교섭만에 센터장 C의 협상 종결 선언이었다.
그러고 얼마 뒤 센터장 C의 부임 후 뽑힌 직원 2인 김태진, 노규태의 진가가 이때 발휘되었다. 이 두 사람은 양대 노총에 가입하지 않는, 일종의 산업별 노조이자 센터로는 제2노조에 해당하는 ‘창의테크밸리유니온’ 설립을 제안하고 다녔다. 김태진과 노규태는 한국 최초 세대별 노동조합 설립에 관여해온 이력이 있었고 여전히 그곳의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센터장 C가 M노총 일반노조 창의테크밸리분회의 교섭력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다른 노동조합의 설립을 지시했다는 말이 나왔다. 복수노조일 경우 조합원수에 따라 교섭대표노조가 정해지면 사측은 소수노조와의 교섭을 거부할 수 있었다. 지도부와 일반조합원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며 시설관리분회의 조합원들의 대규모 이탈이 가속화되면서 수혜를 보는 쪽은 때를 맞춘듯 발족한 창의테크밸리유니온 준비위원회였다. 창의테크밸리분회 내 갈등은 엄연한 사무공간에서 이뤄진 노조간부와 일반조합원간 주먹다짐으로 외화되었지만 센터장 C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A동 2층 사무실로 창의테크밸리유니온 준비위원장을 만나러온 일반 조합원과 이를 쫒아온 노조간부와의 주먹다짐이 벌어지는 광경을 벌벌 떨며 지켜보면 직원들의 문제제기에도 아랑곳 없이 센터장 C는 이 폭력적 상황이 결과적으로 자신과 조직의 발전에 유리한 방향이라면 그대로 묵과할 작정이었을 거였다. 그리고 사무실 한복판에서의 난투극은 하나의 헤프닝으로 종결되었다. 창의테크밸리유니온 준비위원회를 띄운 김태진과 노규태는 불안정한 노동구조에 놓인 중간지원기관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조직화하는데 힘썼고 M노총 일반노조 창의테크밸리분회의 반지도부파인 시설관리 직원들이 대거 이동해오며 새롭게 만들어진 제2의 노조는 교섭대표노조로써의 자격을 갖춰나갔다.
노동자들의 민주적 자치조직인 창의테크밸리유니온 준비위원회가 무자비한 속도로 공식 설립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랄라는 율무를 통해 민지와 센터장 C 사이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접수받고 있었다. 랄라는 율무에게 이야기를 듣는 동안 변변한 직원협의체 하나가 없었다는 생각을 했지만 강력한 속도로 불도처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법적 지위가 보장되는 노동조합 설립으로 왜인지 무기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느슨한 형태로 구성원들의 뜻을 모아나가보는 일이 우선이라며 자치적 커뮤니티부터 시작해보자는 나인의 주장이 영 힘을 못받고 있었다. 센터장 C의 적극적 지원으로 열린 노조 설립 직원설명회에서 나인은 보통의 시민사회단체에 있는 직원협의체 설치가 먼저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창의테크밸리유니온의 설립 구호에 대다수 직원들은 제2노조 설립에 찬성하고 나섰다. 분회장과 블루스까지 췄던 여진은 제2노조 조합가입서를 최초 작성한 사람이 되었고 자신은 보수세가 강한 지역 출신이라며 그래서 노동조합은 뿔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고 웃으며 떠들고 다녔다. 물론 그 말에 호응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랄라는 나인의 말이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강력하게 권리가 보장되는 노조설립파의 주장에 밀려서라기 보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사건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창의테크밸리에 입주해있는 청년혁신플랫폼 내부 권력투쟁 과정에 벌어진 여타의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커버사진: Unsplash의 Darshan Gavali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