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PART-마지막> #함정 ②
센터장 C는 사직 후 두달만에 이곳으로 다시 날아들었다. 랄라를 통해서였다. 그는 랄라의 등 뒤에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거대하게 서서 한없이 작은 자신을 온화한 미소를 띄며 굽어보는 모양으로 나인을 찾아왔다. 전 직장 동료에게서 들었다며 온라인 기사가 게시된 시점 보다 20여분쯤 뒤 랄라는 나인에게 그의 영전 소식을 전했다. 엠바고가 풀릴 시점에 맞춰 함께 돌기 시작한 소문은 급속도로 이 섹터에 퍼져나갔고 곧 기사가 뜰 것이라는 랄라의 말에 의심없이 나인은 민지가 기사를 보고 알기 전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 속엔 세가지쯤이 생략되어 있었다. 하나는 여럿의 신상이 걸린 사건이었던 까닭에 주변의 억측을 우려해 지금까지 쉬쉬해온 이 페어플레이가 통하지 않는 무자비의 게임판 속에 발을 들였다는 뒤늦은 깨달음과 이 일방적 페어플레이로 평판조회 과정에서 그의 결함이 드러나지 못하며 결국 덕을 본 이가 바로 그라는 현실세계의 메커니즘에 대한 실소였고, 마지막은 그의 결함을 알고도 발탁한 것이라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는 항복선언이었다. 상대는 꼭 도박판의 선수처럼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크기만큼 몸집을 과장되게 불리고 등장했다. 강가 앞 창가에 놓인 촛불처럼 타의에 의해 생사의 여탈이 좌우되는 한낱 시 산하의 기관장에서 국가 최고 기관 중 하나, 곧 그 자체로 권력기관인 상태로였다. 눈 앞의 체급의 차가 엄연했다. 깔고 앉은 밑천이랄 것이 뻔했으므로 그를 상대로 유의미한 결과값을 얻기란 붙어보지 않아도 눈 앞에 결과가 선하게 보였다. 미래를 담보 잡아 게임판에 나설 명분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엄연한 질서에 굴복하지도 그렇다고 안주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판판이 지는 싸움에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불의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나인은 꼭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정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물리치며, 자신 앞의 창창한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자위했다. 승패와 승율 따위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이 역시 익숙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승부욕이 일지 않는 싸움판에 뛰어든 모양이 영 몸에 맞지 않았는데 이 판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결과는 내 마음 같지 않았지만 상대에게도 타격을 입혔다는 일말의 위안거리도 존재하지 않는 무결한 종결. 나인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차례로 떠올리니 차라리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정념을 비우고 머릿 속으로 계산을 마치는 것이며 민지와 의논해 회복의 시간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나인은 민지에게 1층 카페에서 커피나 한 잔 하자고 메시지를 넣으며 끝까지 그녀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업무시간 중 틈틈히 딴짓을 부릴 때 하던 수법 그대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어디매쯤에서 그녀가 뒤따라나왔다. 그녀는 나인의 뒤를 종종대듯 뒤따르며 이날 점심시간 직후 있었던 신임 센터장과의 면담에서 특이사항이 없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다음날 오전 나인의 다음으로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센터장 C의 사직 후 한 달반이 조금 지나 새로 부임한 센터장은 별다른 계획을 밝히지 않고 한달동안 직원들과 면담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면담은 그의 비어진 일정에 팀원과 팀장, 실장순으로 차곡차곡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팀장 중 가장 마지막 순서에 배치된 건 민지였고 그 바로 앞순서가 나인이었다. 나인은 그가 지난 일들을 소상히 알고 있다고 아는 척 하며, 자신이 센터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분란 없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그가 주로 사측을 변론해온 노무사 출신으로 갖가지 조직 내 분쟁을 다뤄왔다는 점을 긴 시간 어필했다고 나인은 말했다.
“노조에서 쓰는 수법을 알고 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설마..”
“우리가 한 게 센터장 쪼까낼 때 노조에서 쓰는 방식이래”
“와 그 정도 말했으면 인권위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
“근데 왜 벌써부터 쫓겨날 걸 신경써. 쫄리나?”
입을 달싹대며 본론으로 접어들 기회를 엿보던 나인은 한동안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입 밖에 꺼내보는 것이었다. 센터장 C의 사직을 두고 향후 대응을 논의하는 자리 이후 처음이었다. 그날 그 자리의 네 사람은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된통 얻어맞은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그러므로 모두는 그날 이후 회복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타인의 폭력의 흔적에 혹여 자신이 가해자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의심하면서 피해입은 억울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공동행동의 그 마지막 대면에서 모두는 가해자가 스스로 사직함으로써 책임을 다했다고 보지 않았지만 그 다음의 수순으로 모법인의 책임자로부터 진상위 보고서에 따라 명백한 성폭력 사건임을 재확인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각종 제도 마련을 약속 받을지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조직적 차원의 공식적 결론을 기록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랄라, 율무 등 두 사람과 달리 나머지 두 사람은 조직적 차원으로 봉합될뿐인 이 피상적 결론이 미결의 불행을 떠안은 피해당사자 개인에게 또다시 희생을 요구하는 것 외 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고 결국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진 뒤 네 사람은 그와 관련된 대화를 일체 나누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율무의 사직으로 네 사람의 관계의 밀도가 예전만 못했고, 각자들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 여지없이 서로의 상처를 들춰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무섭게 지나며 영영 꺼내보지 않고 묻어두기로 작정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함구하게 된 것 같았다. 지금 이순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였다.
또 나인은 이 침묵과 함구의 상태가 실질적으로는 당사자인 민지의 의지가 강하게 작동되는 것이라 내내 위안하며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는데, 그래서 자주 모두를 함구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은 오히려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의구심의 근거는 공동행동의 마지막 논의 후 일주일쯤 뒤 나인에게 따로 보낸 민지의 메일 때문이었다. 나인은 그때 센터장 C의 사직으로 인사위가 열리지 못하자 누구보다 무력해진 사람이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그토록 보위하려는 조직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 조직이 누구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오랜 시간 냉소했다. 절차에 따라 주어지는 힘에 취하기는 쉬웠고 책임은 절차에 따라 부여되는 것 같지 않았다. 권력을 쟁취한 사람들에게 조직은 스스로 반성하고 벌을 줄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그런 까닭에 그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까지 심어주기도 했다. 나인은 정작 자신도 조직의 존치에 유리한 방향으로 공동행동에서 의견을 내고 있었다는 것은 까먹은 채 지금의 결론에 대한 민지의 좌절감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동행동의 대장이라도 되는 듯 상대로부터 내내 공격을 받던 사람은 자신이었다고 생각했고 민지가 이 일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서 나인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그만 잊자” 였다. 그리고 그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며칠 뒤 민지로부터 메일을 받고서 그녀의 상실에 대하여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업무 외 사적 용도로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메일이었기 때문에 그건 굉장히 예외적인 것이었고 그 때문에 나인은 민지의 메일을 몇번을 다시 읽고 다시 읽었지만 답장을 보내기 위해 몇번을 다시 쓰고 다시 쓰다가 결국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민지와 따로 선 자리에서 난데없이 툭하고 튀어나온 그 말, “미안하다” 라는 그 말 때문에 나인은 정말로 끝이 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민지는 그 날 어스름한 새벽 버스를 타고 조찬회의에 가던 중 인적이 없는 대학가 한복판에서 간결하게 펜스를 치고 제대로 된 보호장비도 없이 맨홀 뚜껑을 열고 맨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두 명의 노동자를 보았다고 메일에 썼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자신도 맨홀 안으로 사라져버리는 상상을 했다고, 그리고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고 고백했다. 그 외 자세한 내용을 잊어버리고 있었다가 나인은 신임 센터장과의 면담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 하다 말고 불쑥 센터장 C, 최식의 소식을 꺼낸 뒤 지난 그녀의 메일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나올 걸 하고 후회를 했다. 나인은 시간이나 떼울 요량으로 어디서 주워들은 카더라통신을 슬쩍 흘리는 사람처럼 센터장 C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전하고는 또다시 실수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소식을 전해듣는 그녀의 얼굴이 낯익은 것 같으면서 동시에 가슴이 철컹하고 내려앉도록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정면에 두고도 굳이 힐끔거리며 민지의 안색을 살피던 나인은 시선을 맞추려 해도 끝내 어긋나버리는 마네킹처럼 초점이 사라진 그녀의 삐딱한 눈 주변으로 어지럽게 시선을 꽂으며 자신인지 그녀인지의 안면근육이 점점 굳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답신은, “상관없다는 거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를 공직에 발탁하는데 이 정도 문제 따위 상관없었다는 것인지, 그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남아있기를 기대했다니 하고 한탄하는 것인지 나인은 그녀의 가슴에 꽁꽁 숨겨둔 진심이 무엇인지 알아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인은 그녀가 분명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 공동체와 가해당사자가 여전한 폭력적 상황 속에 놓인 피해자인 자신의 상태를 감지하는 감도에 대해서만은 불행하게도 정확히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 공간으로 돌아와 드디어 나인과 시선을 맞추며 랄라의 면담내용에 대하여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성과지표 연구의 표본집단을 넓혀보는게 어떻겠냐는 둥 외부 연계 자원 발굴 연구도 했으면 좋겠다는 둥 랄라와는 한참 사업얘기를 했다던데 하는, 랄라의 면담과정에서 알게 된 새 센터장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과거 경험에 따라 배운 것처럼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열심히 관심 밖 주변 사물에 대해 거짓말처럼 떠들어댔다. 그녀는 드디어 몸의 전체가 늪 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도 않는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끝내 구해달라고 말하지 않고 있었다. 나인은 살려는 의지를 잃은 사람이 자신인지 그녀인지 모른 채 그녀의 철지난 메일 속 말들을 집착적으로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있었다. 나인은 이 절망 속에서 벗어날 방법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았고 맨홀과 고립과 외로움과 상실감 이라는 말들이 맴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커버사진: Unsplash의 vadim kaipov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