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띄우는 편지

소설 <PART-마지막> #종결

by 수빈조

이 날의 저녁식사는 비현실적으로 따뜻했다.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식기들이 슬쩍슬쩍 부딪히는 소리와 공간에 잔잔하게 흐르던 오래된 가요, 멀리서 작게 들리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때때로 등장하여 조용히 이곳저곳을 챙겨주는 매니저의 세심한 서비스 멘트와 제스추어, 음식을 담은 그릇이 등장할 때마다 쏟아졌던 플레이팅에 대한 감탄과 만족스러운 맛평가 등 대화의 공백은 끊임없이 메워졌다. 랄라는 덕분에 둘 사이의 메신저 라는 직분을 망각하고 식사자리를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술이 다소 부족하다 생각했지만 그 뿐이었다. 어느 하나 튀는 것 없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식사는 이어졌다. 폭풍우가 오기 전 깊은 고요와 같은 시간이 한차례 식기가 정리되고 커피와 디저트로 메뉴가 교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은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생의 경로를 어떻게 잡고들 계시나?”


얼마전, 점심시간 장사를 하지 않아 비어진 작은 펍에서 비건식 메뉴로 팝업식당을 연 율무 소식을 랄라가 나인에게 전하고 있는 걸 지켜보던 문주선배가 또다시 새로운 화제를 꺼내들었다.


“저는 이제 진짜 박사과정을 밟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선배는 박사 어디까지 했죠?”

“논문 써야지. 나도 갈길이 멀다”

“작은 소원이라면 어느 소도시의 국책연구기관에 들어가서 지역에서 살아보는 것인데…”

“너무 좋지! 나인은?”


문주선배가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인양 해사한 얼굴을 하고 랄라를 쳐다보고 있는 나인에게 이번엔 너의 차례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걸었다. 가까운 미래를 희망해보는 일이 나인에게 퍽 낯선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하루하루 살아내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일년 후에는 오년 후에는 십년 후에는 어떤 모습이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였다.


“저는.. 아직 못 정했어요. 그냥 우선 좀 프리랜서로 지내보려고요. 앞으로 조직생활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하고. 돈이 아쉽긴 하지만 마음은 편해요”

“당시에는 온통 별 일 같은데 멀어지고 보면 별 일 아닌 거 같지 않아?

“....”


나인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여전히 자주 그 시점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러다가 멀리 도망쳐오기가 일쑤였다. 그러고나면 다시는 그런 환란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지 말아야 한다고 복기했다.


“그럴 때 돌아와요. 이번엔 나인이 별 일 만들어”


나인은 문주선배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이블 앞으로 끌려오듯 몸을 일으켜 백자기에 코발트색 오리엔탈 무늬가 프린트된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키는 척 하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두 손과 두 팔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한자 팔자 모양으로 놓였다. 나인은 커피잔의 손잡이와 소서 둥근 표면을 검지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듯 만졌다. 돌아오라는 말이 어색해서였는데, 나인은 계속해서 돌아올 곳에서 생각이 멈춰섰다. 그곳이 어디인지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곳은 정녕 자신을 그곳의 시민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는지 등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계속 한자리에 머무르는 것이다.


“나는 상황이 뭣 같아서 돌아오라는 말은 못하겠어요. 이제 내가 정말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티클만큼이라도 일조하며 이 섹터에 있나 가끔 까먹어요. 그냥 이 모순적 세계의 성실한 복무자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 여전히 가슴이 불타오르기도 하고”


옆자리의 나인과 같은 모습으로 자세를 고쳐앉은 랄라가 벽쪽의 팔 한쪽만 테이블 위에 두고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채 말을 하다가 가슴이 불타오른다는 말을 할 때 겸연쩍은 듯이 나인에게 얼굴을 돌려 윽 하고 괴로운 시늉을 했다.


“그냥 이쪽 저쪽으로 당분간 배회해도 괜찮지 않을까 선배? 여행하듯이. 감각 잃지 말고. 대신 멀리 가지도 말고 적당한 거리에서. 그래 나인 너무 멀리 가지마. 나의 부분으로 남아있어줘요 나인”


랄라의 몸이 완전히 나인쪽으로 돌아와 앉았다. 간청하듯 사정하는 투로 그녀가 말을 마쳤을 때 그녀의 얼굴이 나인을 향해 아래에서 위쪽으로 향해 치켜뜨는 것처럼 턱을 목에 붙이고 입을 앙다문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 떠나있었다는 원망과 오랜 시간 힘겨운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얼굴 같았다.


“사랑 고백 같네”

“사랑 고백 맞아요!”


나인이 그런 랄라의 얼굴을 쓱 쳐다봤다가 시선을 거둬 그녀에게 완전히 굴복한 사람처럼 말했다. 랄라가 몸은 여전히 나인에게 열린 채로 그러나 얼굴은 문주선배에게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이 난듯 의자에서 튀어오르듯 과장된 몸짓으로 나인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아! 그나저나 여행은 어땠어요? 어디라고 했지? 되게 낯선 지명이었는데!”


도피하듯 다녀온 여행이었다. 어쩐지 감흥은 예전 같지 않았다. 기자생활을 하며 넓어진 네트워크를 활용해 여행도 DIY처럼 코스를 소수의 입맛에 맞게 짜주는 여행사를 준비중인 선배의 제안으로 뜻하지 않게 감행된 여행이었다. 그러므로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낯선 장소와 프로그램으로 설계된 이 베타테스트 성격의 여행상품은 선배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크루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상품은 꽤 인기가 많아 언제나 만석이었는데 추석연휴 결국 시댁에 가게 된 어느 집 며느리의 불운 덕분에 코카서스 3국 중 2개국만 도는 코스 한 자리가 나인의 몫이 된 것이었다. 선배에게 최종 예약 확정 연락을 받고 신청 3일후 나인은 여행객이 되기로 했다. 선배와 그의 크루원들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어느 호텔에서 모이고 다시 트빌리시 어느 호텔에서 흩어졌다. 어쩌면 나인에게 진짜 여행은 집에서 트빌리시로, 트빌리시에서 다시 집으로 오는 길이었을지도 몰랐다. 갈 때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과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를 거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4일을 홀로 보내고 트빌리시로, 돌아올 때는 트빌리시에서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블라디보스토크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행의 시작점이자 목적지였던 트빌리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인은 이유 모를 깊은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속 어디에도 속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망연자실해져 버린 것이다. 나인은 여행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허둥거리다시피 했다.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영영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 같았다. 자신이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반겨줄 사람이 영 없는 것 같았다. 짜여진 여행코스를 쫒아 움직이며 사고와 의식을 끄고 위치감각과 취향을 지운 채 9일의 시간을 보냈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거나 지난 시절 일깨워진 자신만의 센서빌리티를 깨울 의지도 갖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 속에 꼭 없는 사람처럼 둥둥 떠 다니듯 여행을 하고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나인은 이틀 내내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사람들은 여행에 대해 자주 물었고 나인은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카즈베기, 카즈베기가 제일 좋았어. 코카서스 산맥 중 하나야. 제우스의 분노를 산 프로메테우스가 쇠사슬로 묶여있던 산이 바로 카즈베기래. 카즈베기의 만년설 봉우리를 바라보며 트레킹을 했지. 스테판츠민다 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해 사메바 성당까지 걷는 거야. 계속 걷고 올라. 만년설 봉우리가 조금씩 가까워 보일 때까지. 결국 정상의 그 만년설산까지 가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그 봉우리가 온 몸을 덮칠 것같이 몸 앞까지 다가와 있을 때 꽤 상쾌한 느낌이 나. 그 순간이 제일 좋았어. 유일하게 좋았어”


일과 삶을 이어가야 한다. 일과 삶 속 각각의 나는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내가 각각의 시제 속의 나를 자주 떠올리며 용서하고 또 사랑하며.

과거의 일들은 꼭 진흙탕 속을 구르는 것처럼 자주 구더기 속으로 나를 빠트리지만 그대로 온전히 기억해야 한다. 때때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낙관을 잃지 않으며 때때로 여행하듯이. 나와 나를 닮을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가야 한다.


커버사진: UnsplashJess moe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

☞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 소설 <PART - two>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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