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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Oct 19. 2017

기분 좋은 의외의 앙상블

:: 보이밀크티 + 화조묘구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건 포트에 물을 올리는 일이다. 머릿속에는 무슨 차로 밀크티를 만들지 떠올리기 위해 애쓰지만 이제 막 잠에서 깬 두뇌의 회전속도는 느릿느릿 거북이 발걸음 같다. 그런 걸 대비해서 무의식적으로 집어 들어도 무방한 밀크티용 티백(전자레인지만 있으면 물을 끓일 필요도 없다는 장점이 있다)들을 구비해놓았다. 대개 잉글리시브렉퍼스트이거나 실론이거나 바닐라가향 홍차이기 마련. 그날도 머릿속 거북이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물이 끓기 전에 정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거북이 옆으로 난데없이 전구가 나타나더니 ‘땡’ 소리와 함께 반짝 불이 들어오더니 중얼중얼.


“보이숙차로 밀크티를 만들자.”



자사호를 꺼내고 숙차를 적당히 떼어 넣었다. 사실 팬에 끓여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미적거리는 잠부터 떨쳐내는 것이 우선인지라 빠르고 간단한 길을 택한 것이다. 때마침 물이 끓어서 예열과 세차를 동시에 진행한 뒤 뜨거운 물을 부어두었다. 아주 진하게 우러나야 하므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 적당한 머그를 찾아 우유를 부은 뒤 전자레인지에 데워야 한다. 그런 일을 진행하다 보면 잠도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마련. 밀키한 맛을 선호하는 취향 때문에 욕심껏 우유를 부었더니 차가운 기운이 많이 남아 있어서 추가로 1분을 돌렸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 이제 진하게 우러난 보이차면 부어주면 된다. 하얀 우유 속으로 붉고 짙은 갈색 보이차가 섞여들며 혼돈을 만들었다가 결국 완벽하게 조화로운 색을 이룰 때 마시기 시작하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보이숙차에서 느껴지는 나무 느낌을 떠올리며 ‘그걸 우유와 섞는다고?’ 하며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한 번만 마셔보시라. 어떤 것을 상상했던 그것보다 훨씬 괜찮은 의외의 맛에 놀랄 것이다. 부드러운 느낌의 파스텔톤 갈색을  띤 이 따뜻한 액체에서는 신기하게도 코코아의 향기가 풍긴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살짝 달콤한 맛이 있어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물론 추가적인 단맛을 원한다면 설탕이나 시럽을 넣어도 무방하다.

한 모금 머금으니 눈이 반짝 떠지면서 어렸을 때 엄마를 졸라 우유에 타 마셨던 코코아의 추억에 기분이 말랑해졌다. 그리고 이 순간에 가장 잘 어울릴 만한 그림을 한 점 소환해냈다.

조선시대에 이암이 그린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이암 ㅣ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ㅣ 1499년 ㅣ 평양조선미술박물관







흑구는 어디서 찾았는지 커다란 새의 깃털을 물고 어디론가 가고 있고 황구는 나무 위로 올라간 고양이를 바라본다. 흰색, 갈색, 검정색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는 삼색 고양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 옆에 참새들을 바라본다. 참새 두 마리가 날아가는데 한 마리는 뭔가 고양이에게 화를 내는 것 같다. 아하, 고양이가 사냥에 실패한 모양이다. 참새는 자신을 잡으려 하다니 너무한다며 고양이를 나무란다. 황구는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고양이가 부러운지도 모르겠다. 흑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방금 ‘득템’한 커다란 깃털과 놀 거라며 자신의 길을 갈 뿐. 얼핏 봤을 때는 흑구가 물고 가는 것이 커다란 생선인 줄 알고 고양이가 참새에 정신이 팔린 사이 흑구 녀석이 조용히 사고를 쳤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과 붉고 탐스럽게 피어난 꽃나무까지 다 사랑스러운 그림이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옛날 그림이라고 하면 산수화나 병풍에 나올 법한 꽃과 당시 사람들을 그린 민화를 떠올리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어서 탁한 밀실로 불어온 한 줌 미풍을 들이마신 기분이었다. 내가 보이밀크티를 처음 마신 순간도 그랬다. 부드럽게 퍼지는 카카오 같은 달콤한 기운에 이름만 들었을 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기이한 맛에 대한 상상이 봄눈 녹듯 녹아 사라졌다.



보이차라는 독특하고 강한 특징이 있는 중국 운남성에서 만들어진 흑차와 희고 자연에서 온, 출생 자체가 다른 우유가 만나 이루는 조화는 마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전혀 다른 개와 고양이, 꽃나무와 새가 만나 이루는 귀엽고 깜찍한 조화와 비슷한 면이 있다. 분리된 장르로 존재하던 영모화와 화조화가 만나 <화조묘구도>를 만들었다면 따로 마셔도 손색없는 보이차와 우유가 만나 보이밀크티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작가 이암은 왕족(세종이 고조할아버지)이었다. 당대에도 영모화(새와 동물을 그린 그림)에 능한 화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세세히 털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방식보다는 먹과 물감의 농담과 자연스러운 섞임(설채법)을 통해 표현했다. 그래서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보드랍고 나른한 미소가 지어진다.



즐거운 의외의 앙상블에 정신이 팔렸던 사이 보이밀크티로 가득했던 커다란 머그가 바닥을 보인다. 속도 든든해지고 잠도 깼으니 이제 제대로 하루를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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