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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Oct 11. 2017

당나라 궁녀들과 티타임을

:: 홍옥 + 궁락도

잔뜩 찌푸린 하늘이 회색 빛 구름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뭐라도 쏟아지면 개운해질 것 같으련만 하늘이 계속 끙끙거리기만 하는 것 같아 답답. 이런 날은 몸과 마음도 덩달아 묵직해진 것 같은 기분에 김장철 절여진 배추마냥 축축 늘어지곤 한다.

그래서 일월담 홍차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홍옥을 마시기로 했다.

품종적 이름으로 치자면 대차 18호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기도 한 홍옥은 대만 특유의 풍운과 상쾌한 박하 향을 잘 느낄 수 있어서 가라앉은 모든 것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작용한 것.



맛있게 마시려고 저울까지 동원해서 정확하게 5g을 다는 동안 시원하고 길쭉길쭉하게 뻗은 건차에서 화향을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음 고민은 어디에 우릴 것인가.

보통의 날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자사호를 선택했겠지만 향을 강렬하게 느끼고 싶었기에 개완을 꺼냈다. 물 온도 또한 높게 해서 우려 차의 맛도 강하게 뽑아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쓰고 떫은맛이 강해질 수 있으므로 그런 뾰족한 맛을 둥글게 다듬어줄 안쪽이 은으로 칠해진 흑유 공도배와 잔을 꺼냈다.

헉헉, 차 마시기 전부터 뭐가 이리도 복잡하냐고?

실은 나도 이 조합을 위해 꽤 오래 공을 들여서 생각하느라 식어버린 물을 다시 한 번 끓였어야 했지 뭔가. 그런데 신기한 건 이런 노력이 반드시 좋은 차의 맛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


뜨거워진 개완에 찻잎을 쏟아 넣고 바로 뜨거운 물을 부어줬다. 찻잎은 물에게 너 잘 만났다고 인사라도 하듯 빠른 속도로 침출되었다. 뚜껑을 덮고 천천히 7까지 센 뒤에 찻물을 공도배로 옮겨 담았다. 찻물과 함께 달착지근한 향기도 함께 빠져 나와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했다. 마치 달콤한 군고구마의 향기 같았다. 밤고구마 말고 호박고구마 구웠을 때 나는 냄새.

잔으로 따라진 찻물의 색깔은 붉고 영롱한 빛깔이다. 왜 이 차를 영어로 ‘루비’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감탄하면서 개완의 뚜껑을 살짝 들어 본격적으로 향기를 감상해보기로 했다. 달콤한 꿀의 향기와 살짝 고소한 느낌 말고도 건차에서 느꼈던 화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박하 향기도 사르르 올라와 상쾌함을 더했다. 복합적이면서도 위로 가볍게 퍼지는 향기를 맡고 있자니 기분도 덩달아 상승.

드디어 붉고 투명한 홍옥을 마실 차례다.



한 모금 머금으니 향기에서 느낄 수 있었던 복합적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도 홍차 특유의 쌉쌀한 맛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다행이 의도했던 대로 모난 데 없이 부드럽고 둥글고 달달한 맛을 이뤄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는.

무겁게만 느껴지던 몸도 점차 가벼워지고 그러면서 얼굴에도 홍조가 돌았다. 홍차를 마시면 자주 느끼게 되는 특성이다.

문득 지금 마시는 홍옥과 당나라의 작품인 <궁락도>가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미상ㅣ당대말기ㅣ타이페이고궁박물관


<궁락도>는 당나라의 후궁들이 차를 마시며 여가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색깔이 마치 홍옥의 빛깔처럼 붉다.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궁녀들의 표정을 보시라, 다들 한 가닥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녀들의 연주 소리가 꼭 지금 홀짝이는 홍옥처럼 복합적인 향기와 맛처럼 조화로울 듯하다.

궁녀들의 얼굴이 발그레한 것은 홍차로 인한 상기는 아니었다. 당나라 시대는 녹차가 주를 이루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림 속의 차는 육우의 <<다경>>에 명시된 순서에 따라 만들어진 차를 같은 책이 제안하는 대로 우려내어 마시는 것일 터. 사람 수와 찻잔 개수가 다른 것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다경>>에서는 차를 끓임에 있어서 거품을 중요시했고, 거품이 없으면 마시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사람이 많아도 거품이 있는 차를 나눠서 마시라고 했고 대개는 3~5잔 정도가 최대치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얼굴색이 하얗고 붉었던 이유는 당나라 때에 유행했던 ‘홍장’이라는 독특한 화장법 때문이다. 무려 7단계를 거쳐야 했다고 한다.

먼저 얼굴을 하얗게 분칠하고, 붉게 볼 화장을 해주고, 이마의 머리털 부근은 황색으로 칠한 뒤,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양 볼 보조개 자리에 점을 찍고, 이마에 꽃무늬 장식을 하고 관자놀이를 연지로 마무리. 그네들은 여기에 머리를 정수리에 모아 올리는 스타일을 추구했다. 높이에 따라 지위를 구분했다고 한다.



머리야 늘 쓱 빗은 뒤 질끈 동여매고,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초스피드 화장으로 언제나 마무리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단장의 기술들. 

그림에선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보이려는 치열한 경쟁 관계였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드센 그녀들의 기 싸움에 말려들지 말고 그저 조용히 차나 마시기로 한다.

<궁락도>를 생각하는 동안 약간 온도가 떨어진 물로 우렸더니 달콤한 맛이 더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때마침 대만에서 날아온 주전부리들이 있어서 곁들여봤다. 새콤한 맛도 있는 파인애플 펑리수는 신 맛이 확 살아났다. 쫀득하고 달콤 짭짤 고소한 누가 야채크래커의 맛은 홍옥의 쌉쌀한 맛을 중화시키면서도 차 맛을 죽이지 않아 좋았다.

그렇게 당나라 궁녀들과 함께한 티타임을 마칠 즈음엔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엽저에서 아직도 내어줄 것이 많다고 항변이라도 하듯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혹시 <궁락도>를 실제로 만나시고 싶다면 타이페이의 고궁박물관으로 가면 되지만 매력적인 그녀들은 인기가 많아 어디 다른 곳을 여행 중일지도 모르니 운이 좋아야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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