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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Sep 18. 2016

소나무 숲의 향기를 느끼며

:: 랍상소우총 + 만학송풍도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더군다나 태풍의 영향이라 했던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삼십 년 하고도 몇 해가 더 지나면서 땅의 주인이 바뀌고 용도가 바뀌었다.

인심도 바뀌어 없던 철책이 생기고 있던 길도 없어지곤 했다.

성묘객의 손에 들린 건 낡아서 너덜거리는 우산 한 개, 막걸리 한 병, 종이컵 한 개가 전부였다.

할머니 마지막 가시던 길, 그 화려했던 꽃상여를 기억한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공기와 무심하게 파랬던 하늘을 기억한다.

하얀 소복을 입은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의 슬픈 얼굴과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을 젊은 아빠의 침통했던 얼굴도.

삼십 년 하고도 수 년 동안 거의 매해 빠짐없이 다녔던 길이었다.

아빠의 차가 진창에 빠져 차를 밀었던 해도, 메뚜기네 여치네 방아깨비를 잡느라 정신이 팔렸던 해도, 뱀을 보고 놀라 무서웠던 해도, 상처난 나무 줄기 사이로 흘러내리는 호박색 송진을 하염없이 바라봤던 해도 있었다.

향기가 좋다며 진덕거리는 송진을 손등에 문질러 놓고선 아무런 향이 나지 않을 때까지 씻지도 않고 코를 박곤 했더랬지.

들어가는 길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들어가면 아늑한 소나무 숲이 죽 이어지던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가져간 종이컵에 막걸리를 부어 올린 뒤 할머니를 마주하고 인사를 올렸다. 막걸리를 봉분 주위에 뿌리며 말을 건넸다.


"우리 할머니 아침부터 취하시겠네."


할머니, 내년에 또 올게, 하고 내려오는 길에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빗속의 산을 바라보다가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고 중얼거렸다.

서울로 돌아와서 휘엉청 밝은 달을 보며 할머니를 생각하다가 그림 하나를 떠올렸다.


이당 ㅣ 만학송풍도 ㅣ 북송 ㅣ 타이페이 고궁박물관


근사한 소나무들이 우뚝 우뚝 위풍당당 서 있고 그 옆으로는 시원한 물줄기가 거칠게 내려오는 계곡이 있다.

산허리엔 구름이 몰려와 신비한 기분을 자아내면서 거친 바위 암벽이 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여백의 한산한 아름다움보다는 꽉 찼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이 그림 속의 선이 한 가닥 한 가닥 섬세하게 표현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쾌한 소나무 숲의 향기가 느껴질 것 같은 그림이다. 아직은 뜨거운 볕의 기세등등함을 식혀줄 계곡의 시원함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록 할머니 만나러 가는 길에 계곡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의 그 길은 그림속의 섬세한 표현처럼 수많은 추억들로 발걸음 발걸음이 모두 빼곡하게 채색된 길이다.

숲은 조금 어두워서 들어가기 무서워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면 분명 아늑한 느낌이 있을 것이다.

나의 그 길도 수년 동안 쌓인 솔잎들이 폭신하게 이어져 있어 비록 멀지만 이 길의 끝에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그렇게 힘들거나 무섭지만은 않다.

그림을 머릿속에 품은 채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 차 마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소나무 훈연의 향이 담긴 정산소종을 마시기로 했다.

날씨도 흐릿하니 참 잘 어울릴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불그스름하고 진한 호박색은 어렸을 때 하염없이 바라보며 향기를 맡았던 송진을 떠오르게 했다.

말랐던 찻잎과 뜨거운 물이 만나 퍼져 나가는 향기는 송진향이 불과 만나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마른 소나무 가지들을 태워 피어난 향기를 머금은 것이 랍상소우총이니까.



그저 작은 빨간 책상이지만 저렇게 한상 차려놓고 보면 담지 못할 것이 과연 무엇인가 싶다.

찻잔 속 물고기들은 깊은 산속 맑은 계곡에서 사는 작은 물고기들을 닮았다.

어쩌면 만학송풍도 왼편의 계곡 속에도 저런 물고기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떨어져 내 발밑에 쌓여던 솔잎들처럼 가느다란 엽저.

'복'자가 선명하게 찍힌 저 그릇은 할머니네 집 옥상에서 집을 부술 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걸 내가 구해 온 녀석인데 퇴수기로 쓰기 안성맞춤이다.



이번에는 빗길이었지만 다음번에는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겠지.

이번에는 막걸리였지만 다음번에는 독한 안동소주라도 한 병 들고 가야지.

그땐 안주거리도 좀 장만해서 들고 가 할머니랑 제대로 한잔하고 와야지.




뱀다리_

이당은 실제로 산수화에 있어 바위에 질감을 살리는 부벽준이라는 기술을 완성했다고 한다. 특히 만학송풍도가 그 기법으로 그려진 대표적인 작품의 예라고. 그림을 보며 꽉 찬 느낌을 받는 것 또한 바위의 질감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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