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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Sep 02. 2016

그냥 그렇게 매일 차를 마신다

:: 딜마 와테 비교 테이스팅 + 복생수경도

무슨 차를 마실까 차 상자를 꺼내어 뒤적이다가 고마운 차벗이 맛보라고 보내준 홍차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뭐가 있나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조금씩 뒤에 붙은 타이틀이 다른 것들을 발견했다.

딜마라는 브렌드의 와테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와테도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한꺼번에 비교 테이스팅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렇다, 테이스팅이란....특히 비교 테이스팅의 경우 결심하지 않으면 쉽게 이뤄지지 않는 무언가라고 볼 수 있다.)



짜잔~~~

심평배, 심평완, 엽저반 등등을 준비해서 예열해준다.



건차의 상태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해둔 뒤 심평배로 투입하고,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준 뒤 타이머를 설정해두고 차분히 기다린다.



타이머가 시간이 됐음을 알리면 즉시 차례 차례 심평완으로 심평배를 꽂아(?)준다.



심평배 속에 최대한 찻물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바로 탕색을 관찰해서 기록한다.

그게 끝나면 향기를 맡아봐야 한다. 이미 다른 탕색에서도 보이겠지만 향기도 다르다.



이런 모든 과정이 끝나면 드디어 맛을 볼 수 있다.

빠르게 후루룩 마시며 입 안 전체에 차가 퍼지도록 해야 한다. 아마 커피나 와인 테이스팅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게 뭔지 알 것이다.

외출했다 돌아오신 모친께서 나의 후루룩 소리를 들으며 어쩜 그렇게 차를 경박한 소리를 내며 마시냐고 타박하셨지만 그렇게 해야만이 차의 정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불어난 엽저의 모양을 관찰할 때다.

심평배를 뒤집어 궁뎅이를 톡톡 두드려준 뒤 뚜껑을 뒤집어 얹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비 맞아 처량하게 불어난 부서진 낙엽'의 모습이겠지만 엽저를 관찰하면 이 차가 어떤 제조과정을 거쳤는지 스리슬쩍 알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난 정말 악필이구나....ㅠㅠ)


관찰한 것들을 빠르게 적고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그리고 나름 내가 내린 이 차들의 평가는 어떤지를 막 적어내려가다가 명나라의 두근이 그린 복생을 떠올렸다.


명 ㅣ 두근 ㅣ 복생 ㅣ 비단에 잉크 ㅣ 147 x 104.5 cm ㅣ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복생'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그림은 진나라의 저명한 유학자 복생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상서에 정통한 학자였는데 시황제가 분서갱유를 명하자, 상서가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그 책을 벽 속에 감추었다가 마침내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의 시대가 열리자 비로소 감추었던 상서를 꺼냈다고 한다.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90세가 넘어서도 상서의 가르침을 설파했다고.

위의 그림은 자신의 신념 하나로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온 노학자가 자신의 지식을 꺼내어 전수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명나라의 두근이 그렸는데 이미 한나라 때부터 레퍼토리로 그려졌던 그림이라고 한다.

기이한 암석과 상서로워 보이는 나무와 식물들이 배경에 있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적는 남자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귀족인 것 같은데도 자신의 몸을 한껏 굽히고 낮춘 채 고명한 학자의 가르침을 받는 중이다.


고백 하나 하자면 내 배낭은 늘 책이며 노트며 필기도구를 챙기느라 엄청나게 무겁다. 뺄 것들을 아무리 다 빼도 여전히 무거운 가방의 무게를 느끼며 절망했던 적도 꽤 있었지만 그래도 책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전생에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도운 노비였음이 분명하다고 한탄하곤 했는데 저 그림을 바라보며 그렇다면 내 전생의 업보를 청산할 수 있는 방법이란 어떠한 역경이 나를 가로막을지라도 나의 길을 열심히 닦아 어떠한 경지에 이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차를 마시고 기록으로 남기고 그에 대해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내가 차를 그저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깊숙이 알고 싶다고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늘 심평배, 심평완을 꺼내어 비교 테이스팅까지 해가며 전투적으로 차를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내가 세운 뜻을 실천한다는 마음으로 그냥 그렇게 매일 차를 마신다.

그럼 언젠가는 정말 그림 속의 노학자처럼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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