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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Oct 20. 2017

그림 속 이른 봄으로 떠난 여행

:: 청우롱 + 조춘도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리라는 약속을 건네는 절기 입춘立春.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봄을 맞이하니 크게 길하고 따스한 기운이 감도니 복되고 좋은 일이 많기를 기원하라는 뜻의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는 주문을 멋들어지게 써서 대문에 붙인다.

절기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비록 현실은 입춘이 지나도 영하의 강추위가 ‘봄이라니 아직 멀었다’며 기세 등등 칼바람을 파견하지만 한낮의 햇살 속에 녹아 있는 노곤함을 감추기엔 역부족이다. 떠나야 함이 아쉬워 괜스레 고집을 피우는 동장군의 엄살이랄까.

책, 영화, 그림, 드라마, 음악……

어떤 예술 작품이든 위대한 작품들을 감상하는 묘미는 반복해서 접하게 되더라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새로운 면모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그걸 스스로의 삶 속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딱히 명필도 아닌(실은 이따금 직접 쓴 글씨도 못 알아보는 악필) 나는 남들이 쓰는 주문을 써서 붙이는 대신 봄이 시작되는 입춘 즈음이면 의례히 곽희의 <조춘도>를 꺼내 감상한다.


곽희ㅣ1072년ㅣ타이페이고궁박물관

이름 그대로 이른 봄을 그린 그림이다. 처음엔 어딜 봐서 봄이라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의 나무들 중 집중적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받고 성급하게 잎사귀가 움튼 것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그리고 배를 젓는 사공이 있다는 점, 산의 비탈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는 점을 살피면 이제 봄이 온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눈에 봐도 가파르고 험한 산인데 낙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르려 하지 않았을 테고, 얼음이 막 녹아 물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을 만큼의 길이 열렸다는 뜻일 테니.

옛날 화공들은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리기 위해서 사실적인 한 순간을 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산의 사계절과 다각도에서 바라본 모습을 직접 담았다고 한다. 그림에 산 속의 모습과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모습,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모습 등을 동시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감상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곳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그러니까 요즘 시대의 동영상 같은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도 적극적으로 <조춘도>를 탐험해보기로 했다.


조춘도, 부분


이 그림에는 무려 아홉 명 정도의 사람이 등장한다. 이번에 나는 그중에서 그림 오른쪽 구석에 있는 뱃사공이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이제 막 산기슭에 닿았다는 상상에서 출발하기로. 목적지는 산 중턱쯤에 있는 기와집들과 사원이 있는 마을로 정했다.



긴(?)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탐험에 동행할 차를 골라보기로 했다. 뭐가 어울릴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묵직한 홍배의 맛과 대만 특유의 풍운이 조화를 이루는 청우롱으로 결정했다. 우롱차를 주로 우리는 자사호도 꺼낸다. 차를 마실 청자 잔의 짙은 옥색은 햇빛을 받아 물이 잔뜩 오른 새순의 색깔 같다. 길을 떠나는 데 비상식량이 빠질 수는 없지, 냉동실에 고이 모셔뒀던 갈레트브루통을 곁들이기로 하고 해동시킨다.     


“나를 내려준 사공은 자신도 사원에는 가본 적이 없다며 조금만 걸어가면 다른 쪽 강기슭에 사는 사공이 있을 거라며 그에게 길을 물으라고 했다. 과연 조금만 걸어가니 사공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주막이 있었다. 이미 점심때가 가까워 배도 출출했으므로 국밥을 시켜놓고 사공에게 길을 물으니 산에서 바로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음지라서 아직 얼음이 녹지 않아 위험해 반대편 강기슭에 배를 대면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몇몇 짐꾼들과 선비들을 내려주었다며 사원이 있는 마을로 가려면 서두르라는 말도 덧붙였다.”     



차를 앞에 두니 저도 얼른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서둘러 봉투를 열고 다하 위로 쏟아냈다. 정말 작고 둥글게 똘똘 말린 권곡형의 차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검은 빛깔이었다. 예열해둔 자사호에 넣은 뒤 바로 한 김 식힌 물을 부어줬다.    

 

“마음이 급해져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채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허둥지둥 사공을 따라 배에 몸을 실었다. 강 중간은 완전히 물이 녹았지만 기슭에는 아직 얼음이 남아 배가 닿으니 와지직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공은 익숙하게 기다란 노로 나무에 묶어놓았던 굵은 밧줄을 끌어왔다. 나는 뱃삯을 치르고 열흘 뒤 이 시간쯤 그를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뒤 그와 헤어졌다. 배가 멀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눈앞의 산으로 옮겼다. 신비한 안개가 굽이굽이 산의 정체를 감췄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까지 막지는 못했다. 아스라히 보이는 사원의 지붕이 너무나 멀게 느껴져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깊은 산에서 홀로 어둠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발길을 서둘렀다.”     



처음 따라낸 차는 짙은 황금빛에 가까운 맑은 호박색을 띄었다. 향기는 홍배 향이 강하게 쓰윽 지나간 뒤 대만 특유의 고소한 두향이 두각을 드러냈는데, 처음에는 코에서 이마로 올라가더니 이내 가슴과 배로 쑥 내려왔다. 마지막에 느껴지는 달콤한 꿀의 향기가 나도 모르게 맛있는 차를 기대하며 꼴깍 군침을 삼키게 한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수월했다. 아직 나무가 우거지지 않은 덕에 길도 훤했고 경사도 가파르지 않았다. 비록 안개 속이라 완벽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긴 겨울을 지나 녹아내리는 계곡물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깊고 깊은 산속에 들어와 정말 다른 세상 어딘가로 향한다는 신비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좁고 기다란 나무다리를 건널 때부터 시작된 불안감은 가파르고 미끄러운 절벽으로 난 좁은 길에 절정을 이뤘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이 길이 나의 황천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말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우러난 첫탕은 달았다. 하지만 특징적인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 물 온도를 높이기로 했다. 더 붉고 진하게 우러난 차에서 비로소 대만 특유의 풍운과 고소한 복합적인 맛이 윤곽을 드러냈다. 여기에 청우롱 특유의 상쾌한 맛이 더해졌다. 아직은 쌀쌀한 겨울인듯 춥지만 그 속에서 봄이 힘차게 다가오는 것처럼 차를 마시고 난 뒤에 입안 전체로 강력한 회감이 퍼졌다.    

 

“대체 왜 이런 험한 산으로 들어올 생각을 한 건지 스스로를 저주하다가도 절벽에 몸을 밀착시키고 바라보는 안개와 숨바꼭질하듯 드러나는 풍경은 다시 사원에서 바라본다는 비경에 대한 기대감을 상승시켰기에 다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발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지기 직전에 산중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의 객잔에는 이미 탁주로 목을 축이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꾹 참고 일몰 풍경을 보기 위해 가장 꼭대기에 있다는 사원의 암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올라갔다.”



이제 갈레트브루통을 곁들일 차례다. 갈색의 먹음직스러운 둥글고 두터운 녀석을 한 입 앙 물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들었던 버터의 풍미가 살아나 입안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그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기진맥진해서 도착한 암자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아직 쌀쌀한 날이었음에도 그곳의 스님은 모든 문을 활짝 열고 차를 마시고 계셨다.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함께 차를 마시자고 청했다. 목이 탔고 기운이 없었는데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다. 전생에 좋은 일 하나는 했구나 안도하며 스님이 내어주신 찻사발을 양손으로 붙들고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좋았다. 앞마당에는 매화가 거짓말처럼 하얗게 피어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가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더니 매화의 꽃잎을 다홍빛으로 물들였다. 하늘은 점점 푸르러지는데 나는 내려갈 생각을 않고 바깥의 황홀한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계속 나처럼 말이 없는 스님이 채워주는 차를 받아 마시기만 했다.” 


자사호를 열어보니 처음에는 그렇게 작게 말렸던 찻잎들이 맛있게 우러나며 쭈글쭈글 몸을 펼쳤다. 언제 봐도 신기한 장면이다.

매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벌써 남쪽의 활짝 핀 매화 소식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나도 어서 날을 잡아봐야겠다. 그림 속에서만 이른 봄을 헤집고 다닐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봄을 만지고 내 눈에 담으러 떠날 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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