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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Nov 08. 2017

변함없이 곁을 지키는 존재가 건네는 위로

:: 동방미인 + 세한도

날이 갑자기 쌀쌀해졌다. 옷장 앞을 서성이며 두꺼운 외투를 만지작거리고 따뜻한 재질로 된 옷들의 위치를 파악해둔다. 땀 찬다고 벗어던진 지 오래였던 실내화도 찾아서 다시 꿰어 신었다. 냉장고에 항시 구비해둔 찬 물을 마지막으로 마셨던 게 언제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이사 온 여름부터 자전거로 쌩쌩 돌던 저류지 주변의 식물들의 색깔도 짙은 푸름을 잃고 노랗게 붉게 갈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겨울이 올 것이고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 해가 시작될 것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생각한다. 뭐 많이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부록처럼 딸려오기 마련이고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크기의 자괴감은 덤이다. 혹은 그저 발랄하게 ‘내년에 더 잘하지 뭐’ 하고 넘어가던지. 문득 복잡한 현실을 뒤로 하고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되도록이면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올해 프로젝트 때문에 잠시 머물렀던 바닷가 마을을 떠올렸다.



무창포에 간 건 오래되어 낙후한 느낌이 드는 관광지의 묵은 떼를 벗기고 문화 컨텐츠를 접목시킨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함과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입혀 지역을 활성화하기 위함이었다. 여행도 좋아하고 한때는 이런저런 팸투어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이 일은 기존 경험과 다른 종류의 일이었기에 고민이 많았다. 일단 지역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숙소에서 빌린 자전거를 끌고 구석구석 답사를 다녔는데 바람 빠진 작은 자전거를 끌고 참 애 많이 썼다. 그곳에서 지내며 가장 신기했던 것은 주말을 빼면 참 사람이 없다는 것. 평일에 텅 빈 거리로, 바닷가로 나오면 혹시 세상이 끝나고 나만 남겨진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어지는 오르막길 때문에 패달을 돌리는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힘들었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 근처에 있는 독산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스러져가는 느낌의 공공시설과 주말을 휩쓸고 간 대학생들이 남긴 빈 술병이 상자 째로 쌓인 민박집 몇 채 말고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군인 말고 민간인)었다. 힘들게 도착한 나에게 내리는 보상으로 배낭에 챙겨온 차 도구를 꺼내어 해변으로 떠밀려온 나뭇조각이네 조개껍데기, 조약돌 같은 걸 가지고 찻상을 차렸더랬다. 그곳까지 힘겹게 달려온 터라 목이 탔기에 첫 모금이 얼마나 달고 향기롭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역시 동방미인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홀짝였다. 갈증이 채워지니 정말이지 나를 둘러싼 공허와 쓸쓸함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떠오른 그림 한 점, <세한도>.


세한도 ㅣ 추사 김정희 ㅣ 1844년 ㅣ 국립중앙박물관

실제로 마주했던 <세한도>는 생각보다 얇은(높이 23.3cm 길이 108.3cm) 그림이었다. 그림의 분위기는 왜 그리도 처연한지, 그리고 전에는 몰랐던 그림 옆으로 주욱 이어진 네모 안의 글씨들까지. 인쇄된 매체로 보는 것과 실물을 보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그 앞에서 추사옹께서 마른 붓으로 그려낸 동그란 문이 난 기다란 집을, 그 옆에 있는 기이하게 몸이 꺾인 늙은 소나무를, 추사체로 이름 높으신 그분의 일상적인 느낌의 암호 같은 한자들을 들여다봤던 날의 기억.


세한도, 부분

황량한 바닷가에서 차를 홀짝이다 <세한도>를 떠올린 건 그가 그 그림을 유배지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추사옹은 제주도에서 무려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가 55세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까지 당한 뒤 유배지에서 홀로 60대를 맞이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나날이 얼마나 억만의 겁처럼 길게 느껴졌을까 싶었다. 지금에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곳으로 꼽는 제주도이지만 당시의 제주도는 천하의 오지 중에서도 오지가 아니었을까. 물론 당시에 유배 생활 동안 지역의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을 미루어봤을 때 울릉도 수준의 오지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연경(현재 북경)을 들락거리고 그쪽 사람들과도 교류하며 문화의 선두주자로서 활동했을 그분께는 문화적 혜택이라곤 0에 가까울 그곳에서의 시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 어부인도 죽고 죽마고우도 죽고...... 많은 일이 있었다. 사회적 지위 또한 높았다가 누명으로 추락했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추사옹이 한국에서 차, 하면 빠뜨릴 수 없는 초의선사와의 교류를 통해 차를 마셨다는 것은 그 역시 차로 쓰린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스렸던 증거처럼 보인다. 그가 그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정신으로 비집고 들어왔을 공허와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그 광활한 공간에서 정말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던 나의 처지에 교차점이 있다는 믿음이 생기자, 추사옹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지만 다만 그도 이따금 바닷가로 나와서 찻잔을 기울이며 흩어진 생각들을 모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뭐든 해보겠다고 집 떠나 아무도 없는 바다에서 차를 마시며 앞일에 대해 걱정하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뇌하는 나의 마음이 <세한도>를 불러낸 것이다.

추사옹이 이 그림을 그린 건 논어의 한 구절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에 부쳐 유배 전과 후 한결같이 그에게 잘한 고마운 제자이자 벗 이상적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오지에서 유배 중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일 뿐이었기에 비슷한 상황으로 유배를 갔던 소동파가 그를 만나러 험한 길을 뚫고 와준 아들에게 그려준, 그림은 유실됐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만 전하는 <언송도>의 의미를 담아 보냈다고. 그러니까 네모 안의 글씨들은 일종의 편지였던 셈.



홀로 앉아 주변의 것을 모아 차린 찻상 위에서 적당히 식은 물로 우리는 동방미인은 맛있게 우러나 나의 고뇌와 쓸쓸함을 녹여냈다.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마셔도, 이렇게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곳에도 마시더라도 찻물이 나에게 건네는 위로와 위안은 한결같다. 역시 차만 한 동무도 없다는 생각. 아울러 나에게도 있는 추사옹의 이상적 같은 고맙고도 또 고마운 벗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렇게 추억을 곱씹고 있자니 마음에 일었던 떠남에의 갈망이 누그러졌다. 물을 끓이자. 그리고 다시 차를 한 잔 마시자. 혹시라도 다시 누그러뜨렸던 갈망이 일어나면 그땐 정말 다시 아무도 없이 텅 비었던 그 바닷가마을로 돌아가야겠다. 그때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그곳의 일몰을 바라보며 차 한잔 기울이고 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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