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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Dec 07. 2017

지난 가을의 절정을 추억하며....

:: 추산문도도 + 홍우롱

대설이라니, 이제 정말 '한겨울'로 접어들었다. 그간 내렸던 눈과 오돌오돌 떨며 거리를 걸은 기억을 떠올리면 맞아,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싱가포르에 다녀왔더니 그 온도 차이는 기대 이상으로 엄청나서 나의 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난 가을에 감기가 호되게 걸렸던 것을 잊지 않고 대비를 잘했다는 것. 같이 여행 다녀온 일행들은 감기가 옴팡 들어 고생 중이라 들었지만 나는 비교적 덤덤히 잘 지내고 있다. 이렇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생각 없이 얇게 입고 나갔다가 불어온 바람에 실려온 낙엽에 얼굴을 철썩 얻어맞은 뒤 이제 겨울이 코앞에닥쳐왔음을 예감했던 그날의 기록을 끄집어내볼까 한다. 

사실 그때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외투를 갈아입고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외출을 감행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몰아 닥친 재채기의폭풍과 꽉 잠그지 않은 수돗물마냥 줄줄 흐르는 콧물의 침공에 무기력하게 함락당했다. 다음날 아침, 눈 뜨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환절기 감기 걸린 사람이 많아 대기자 명단은 길기만 하고...... 멍하니 앉아 모니터로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리며 그때 그 낙엽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주사 한 방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공기는 차가웠지만 아직은따뜻하고 노곤한 햇살을 받으며 여전히 붉게 타오르는 매혹적인 가로수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이 마지막 가을을 조금 집으로 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감기 환자가 찬바람을 쐬며 밖에서 티타임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나름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 가을에 가까운 예쁜 빛깔의 낙엽들을 주웠다.



약기운 덕에 재채기는 가뭄에 콩 나듯, 콧물은 이따금 흐르는 것을몸으로 체험하며 병원 다녀온 보람이 있다며 찻자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홍우롱. 비록 태생은 우롱차이나홍차 제다방식으로 만들어 깊고 달콤한 맛이 만추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여겨졌기 때문. 자연스럽게 홍차를 주로 우리는 자사호를 꺼냈다. 가을에 피는 노오란 국화가 그려진 잔까지 꺼내고 아까 조심스럽게모아서 돌아온 낙엽들까지 배치하고 나니 완연한 가을이 눈앞에 짜잔!

자사호에 우리니 깊은 맛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향기도 성급하게퍼지지 않고 차분하게 올라온다. 찻물조차 가을 색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한 잔 두 잔 마시는데 문득이 찻상을 그대로 거연이 그린 <추산문도도秋山問道圖>로 옮겨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고? 그림을 한번 살펴보자.

거연 ㅣ 추산문도도 ㅣ 오대 ㅣ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관


가파른 바위로 첩첩이 이어져 하늘 높이 올라간 산이 있다. 주로침엽수들이 많이 보인다. 이것만 보면 하얘 보이는 바위도 있고 해서 오히려 겨울의 산(침엽수들은 겨울에도 푸르르니까요)을 표현한 것만 같다. 과연 이게 가을 산이 모습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그림을 살펴보자.


꼭대기로 올라가면 잎사귀들도 보이지만 무성하지는 않고 듬성듬성하다. 



그리고 그림 맨 아래를 보시면 물가에 수초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데 왠지 꼿꼿함을 잃고 힘이 빠져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시선을 다시 조금만 더 위쪽으로 향하면 암자가 보이고 그 안에 선비가 꼿꼿이 앉아 시선을 밖으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오른쪽으로 한 사람이 더 앉아 있다. 두사람이 가을이 무르익은 산속에서 도道가 무엇인지 서로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작가인 거연은 이 그림에 <추산문도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



이들의 대화 자리에 가을 빛깔이 충만한 찻상을 들고 끼어들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그럼 조금 더 생기가 도는 가을 산을 그린 그림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물론 두사람이 고심 끝에 내놓는 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장 소중한 덤일 터.

그나저나 두 사람이 저에게 도가 뭐냐고 물으면 조금 놀라긴 할 것 같다. 

평소에 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하고 물어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정말 깜짝 놀라서 도망치곤 했는데 저 첩첩산중에는 초가집 하나밖에 없으니 도망갈 데도 없고.



우선은 얼른 차부터 우려서 따라야지. 그리고 차 맛에 대한품평을 들어보고 나 역시 아주 천천히 그 차를 음미하며 마시는 척(실제로는 진땀을 흘릴 것이 뻔하다)하며 속으로 열심히 대답을 생각해보는 거다.

아하, 더듬더듬하게라도 이렇게 말해야겠구나.

“전 솔직히 말씀 드리면 도가 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이번 가을이 저에게 남긴 진실은 이렇습니다. 추풍에 낙엽이날려 얼굴을 철썩 때리면 가을이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거니까 거기에 꼭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이죠.”



말을 마치자마자 후다닥 짐을 챙겨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하산해야지. 산자락에서머지 않은 곳에 뜨듯하고 든든한 고기국수 한 그릇 말아줄 객잔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림 속의 두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이 그림을 그린 거연은 주지스님까지 한 경력이 있으니까 나의 말에 염화미소를 지어줄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상상해본다.



그림 속 가을 산을 탐방하는 사이 모아온 가을은 어느새 말라 더 진한 색깔을 띠었다. 홍우롱 찻잎도 임무를 다했다. 마지막 잔을 마시며 눈을 들어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가을 가로수들을 바라봤다. 감기가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아 불어난 엽저를 살피며 고마움을 전했다. 

대설인 오늘, 어젯밤에 펑펑 내린 눈 덕분에 창밖은 온통 흰 세상이다. 차보다는 왠지 핫초콜릿 한 잔이 더 어울릴 것만 같다. 가만, 나한테 초콜릿 가향 차가 있지 않던가? 어서 차통을 뒤져봐야겠다.

그나저나 여러분, 자나깨나 감기 조심하세요~! 건강이 최고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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