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단순한 교육 요청이었다. 한 기업에서 고객 응대 교육 강사를 찾고 있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조건에 맞는 강사를 찾지 못해 결국 나에게 직접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요청받은 주제는 기본적인 서비스 교육이었지만, 강의 자료를 준비하며 회사의 실태를 들여다본 순간 방향을 바꾸었다. 이 회사에 필요한 건 서비스 마인드가 아니라, 전반적인 고객 대응 프로세스의 재설계였다.
그렇게 컨설팅이 시작됐다. 3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사를 방문해 TF팀과 함께 업무 프로세스를 점검하기로 했다. 규모가 크지 않은 회사였기에 TF라 해도 전체 인원의 절반 가까이가 참여하는, 비교적 밀도 높은 회의였다.
첫 단계는 업무 분장표 확인이었다. 누가 어떤 업무를 맡고 있으며, 고객과의 접점에서 어떤 프로세스가 작동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다음으로는 콜센터의 인입콜 데이터를 확인했다. IVR이 아닌 CTI와 교환기 기준으로 일간, 주간, 월간 단위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IVR 로그와 연계해 흐름을 추적했다. 데이터를 볼수록 확신이 들었다. 이 회사는 고객의 콜 데이터를 ‘전혀’ 관리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관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콜센터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데이터를 모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콜센터 운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콜 통계를 읽지 못하다 보니, 전체 콜 볼륨을 기준으로 인력을 배치하지 않고 가용 가능한 인원수에 맞춰 스케줄을 짜고 있었다. 이로 인해 특정 시간대에 버블콜이 쏠렸고, 상담사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들이 대부분 아르바이트생이었고, 상담 기본 지식이 부족해 많은 업무가 결국 정규직 직원에게 이관되었다. 정규직은 본연의 업무 외에도 추가 부담을 떠안고 있었다.
전문적인 고객 서비스 부서를 따로 구성하지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 이후 급증한 콜로 인해 이런 비효율이 발생한 것이었다. 정규직 직원의 서포트를 위해 채용한 파트타이머들의 효율은 낮았고, 직원들은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성과를 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명백히 비효율적인 구조였다. 그러나, 회사는 정규직 인력 확충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에, 나는 그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상담사들의 업무 완결성을 높이면 정규직 직원들의 업무량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는 것을, 데이터를 통해 입증해 보였다. 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가 비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매주 모여 데이터를 함께 분석하고, 현장의 피드백을 반영해 하나씩 구조를 개선해 나갔다. 콜 데이터를 읽는 방법부터, 인입 흐름에 따라 IVR을 조정하고, 문의 유형별 상담사를 배치하는 방식까지 단계적으로 점검했다. 3개월 후, 이 회사는 ‘고객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듣고 해석하는 법’을 갖추기 시작했고, 실제 고객 응대 품질도 눈에 띄게 나아졌을 뿐 아니라, 불만율이 확 줄어들었다.
이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데이터는 단지 수집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법’을 배워야 진짜 자산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회사들이 고객의 불만을 직원 개인의 역량 문제로 돌리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프로세스의 설계와 시스템의 불친절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고객이 느끼는 ‘친절함’은 결국, 회사 전체가 고객을 위해 얼마나 구조적으로 준비되어 있는가에서 비롯된다. 상담사가 처리할 수 없는 문의를 매번 2차로 넘기고, 고객이 같은 설명을 두세 번 반복하게 만든다면, 그건 AI 챗봇이나 ARS와 다를 게 없다. 기술이든 사람이든,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것이 ‘친절한 회사’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진짜 서비스 개선은 ‘말’이 아니라 ‘구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언제나 데이터 속에 힌트를 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