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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엎질러진 우유, 서비스 회복의 패러독스

by 오경희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속담들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우유를 엎지르고 나서 울어 봐야 소용없다.'와 같은 말이다.


회복할 수 없는 관계를 앞에 두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이제 우리 관계는 끝났어요라고 말을 한다.

물을 엎든, 우유를 엎든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이를 기회로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가져올 수는 있다.


회사에서 고객관련한 업무를 하다 보면 작은 실수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다.

필자가 겪었던 것 중에 회사가 쉽게 생각했다가 큰 코를 다친 일은 바로 방송 편성과 관련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TV프로그램은 정기 개편이라는 것을 한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장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류에 의해서 없애기도 한다. '전국노래자랑'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여전히 장수하는 프로그램으로 송해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다음 진행자가 누가 될지가 거의 전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과거 뽀미언니로 유명한 '뽀뽀뽀'라는 프로그램은 프로그램 개편을 통해서 뽀미언니를 교체하고 나서 엄청난 시청자층의 항의를 받기도 했고, 프로그램의 폐지로 인해 시청자 게시판이 마비된 사례도 있었다.


케이블 TV도 비슷하다. 일반 방송국의 프로그램 개편과 비슷한 일이 채널개편인데 예전에는 일 년에 2번 정도 진행되던 것이 고객들의 혼란으로 인해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해서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변경한다.

과거, 채널 개편에 관련된 문제로 인해서 공정거래위원회까지 나서서 중재하려고 했었다. 이유는 채널 개편에 대한 고객 권리 침해를 이슈로 보고 채널 개편이 되면 위약금 없이 해지가 가능해야 한다는 문구를 넣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결국 잘 이해시키고 마무리되었지만, 그 정도로 핫한 이슈이다.


케이블 TV가 처음 개국할 때는 전체 29개 채널로 방송을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은 해마다 채널 수가 늘어나는 추세였기 때문에 고객 민원이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채널수가 늘어나게 되자, 사용할 수 있는 채널 대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송출할 수 있는 채널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의 월 4천 원만 내면 볼 수 있었던 유선방송과의 경쟁으로 인해서 전채널 송출이 아닌 보급형, 기본형, 고급형 등 가격대도 다양해지게 된다. 보급형의 고객을 기본형 또는 고급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핵심 채널을 잘 골라서 이동시켜야 하는데, 어떤 채널을 배치하느냐가 마케팅의 핵심 전략이다. 너무 좋은 채널만 하위 채널에 배치하면 고객들이 기본형이나 고급형을 선택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고객단가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채널 개편은 그래서 케이블 TV나 IPTV에서는 가장 핫한 연간 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아날로그 TV 시절에는 채널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각 채널별 고유번호를 가지고 있어서 전국적으로 같은 번호로 시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채널 수가 많아지고, 방송이 디지털화가 되면서 번호에 대한 선호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채널 개편을 하게 되면, 채널 번호 변경에 대한 문의가 상당히 많이 들어온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사전에 채널표를 발송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예전에는 설치를 하면 책받침으로 만들어진 채널표를 제공하고, 채널 변경하면 고객에게 발송을 한다. 그런데, 이 발송비용이 상당하다. 가령 가입자가 10만 명이라고 했을 때, 개당 1천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가정해도 1억의 비용이 집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고객이 채널표를 활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젊은 층에서는 오히려 채널편성표를 불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하였다.


그래서 채널편성표 발송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고객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사항이므로, 채널 개편 1달 전에는 편성표를 제작해서 설치 및 AS시에 고객댁내 방문 시 드리기도 하고, 영업 전단에 함께 드리는 것으로 사전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했다.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회사의 가입자가 400만 정도 되었으니, 당시 우편비용만 해도 상당 금액 절감할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사전에 고객커뮤니케이션을 충분히 했다고 판단했는데도 불구하고 고객의 민원이 상당히 들어왔고, 고객의 요청으로 대략 6천 건 정도의 채널편성표를 발송했다. 400만에게 발송해야 할 우편비를 6천 건만 발송했으니 잘했다고 해야 할까? 재발송을 요청한 고객들의 대부분은 노년층이었고 그들의 민원은 상당해서 우편 발송뿐 아니라 현장기사를 통한 인편 배달도 있었기에 그 해에는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억의 비용을 절감할 기회를 버리고 누가 요청할지 모르니 전체에게 다 보내야 하는 게 맞을까?


다음번 채널 개편에는 전년도에 채널 편성표를 발송해 주기를 요청했던 고객들의 리스트를 따로 뽑아서 신규 채널 편성표를 발송했고, 채널 개편 관련 문자 메시지에 인터넷에서 확인 가능한 URL을 고객들에게 발송했다. 또한 채널 변경시기에는 공지채널을 통해서 채널 변경만 안내하기도 했고, 고객 전화가 인입되면 ARS에서 공재채널을 보시도록 유도했다. 2년 정도 지나면서 프로세스는 안착이 되었고, 채널 개편으로 인한 고객의 민원은 크게 감소되었다. 또한 디지털로 시스템이 발전되면서 해당 채널을 틀면 이전의 채널이 몇 번으로 이동했는지를 표시하는 장치를 두기도 했다.


채널 개편관련해서 고객의 민원이 너무 거세서 그룹사의 제품 불매 운동을 하겠다는 소비자단체의 성명이 발표되기도 했고, 방송국으로 내방해서 난동을 피우는 고객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한번 잘못되었다고 계속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좋은 프로세스를 만드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가 근무하던 회사의 경우는 이런 프로그램을 서비스 리커버리라고 불렀다. 한번 불편을 야기시킨 고객에게 그 불편을 극복할 수 있는 리커버리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프로세스로 정착되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일들이 결국은 조직의 역량을 향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CS조직에 데이터경영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실패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 이후의 대응 프로세스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초기 대응부터 원인 분석, 문제 해결, 후속 관리까지 명확한 단계별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조직 전체가 이에 따라 움직이도록 훈련해야 한다. 가령 아마존은 고객의 배송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적인 문제 해결과 함께 불만 사항을 사후적으로 관리하며 고객의 만족을 회복한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대응 프로세스는 고객과 기업 간의 신뢰 회복에 필수적이다.


흥미롭게도 고객 서비스에서는 종종 실패가 오히려 더 강력한 팬덤을 만들어내는 역설이 나타난다. 이것을 서비스 회복의 패러독스(Service Recovery Paradox)라고 부른다. 고객은 불만 상황에서 뛰어난 대응을 받게 되면, 처음부터 아무 문제가 없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순간은 기업이 고객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더욱 깊게 만드는 기회로 작용한다.


더 나아가 조직 내부에서도 실패와 불만을 처리하는 과정을 단순히 위기 극복으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성장의 자산으로 보는 문화가 필요하다. 실패 사례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조직적으로 학습할 때, 회사는 더욱 성숙하고 고객 중심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실수를 인정하는 문화를 만들면 직원들이 문제를 숨기기보다는 개선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실패 대응 체크리스트를 마련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실수가 발생했을 때 혼란에 빠지지 않고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기업은 현장 직원과 관리자를 위한 명확한 행동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결국 고객 중심 경영에서 우유를 엎지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순간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우유를 엎질렀다면, 신속히 그리고 진심으로 청소해야 한다. 이것이 고객 신뢰와 기업의 장기적 성공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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