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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 Days Jan 19. 2023

임신 중기의 기록 - 1 (14주-15주)

고독한 연말의 기록

임신 초기의 기억은 대부분이 입덧이다. 내게는 입덧이 너무나도 고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입덧에 순응하며 디클렉틴 (입덧약)에 의존해 매일매일을 살아내던 기억 밖에 없다.


14주부터는 통상적으로 임신 중기, 영어로는 2nd Trimester이라고 불리는 구간에 진입을 한다. 임신을 하고 절대적인 '안정기'는 없다고 하지만, 임신 5주 차의 임신율이 21.3%인데 비해 14-20주에 접어들면 1% 미만으로 하락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초반이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시기인 게 맞다. (출처: Medical News Today)


14주부터는 확실히 입덧도 많이 나아졌다. 매일 밤 두 알씩 먹던 디클렉틴은 한알로 줄였으며, 내가 먹을 수 있는 종류의 음식도 훨씬 많아졌다. 아직도 고기나, 돈가스류는 어렵지만 확실히 무얼 먹어도 거부감은 줄었고,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어 잘 못 먹는 빵류가 계속 당겼다. 거동도 확실히 나아져서 주말에는 약속도 두 개를 잡고, 하루는 반차를 내어 나의 사회생활 첫 선배이자 (어느덧 12년 전) 육아선배의 집에 가서 귀여운 딸도 영접을 하고, 선물도 잔뜩 받아왔다.


하지만 14주에 접어들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마무리를 할 무렵 출혈을 마주하게 되었다. 임신 초기 때는 혹시나 태반이 나올까 봐 힘도 못 주겠다는 글들을 많이 읽었었는데, 원래 임신 전에 변비가 있었지만 임신을 하고 변비도 없어지고 볼 일을 보며 힘든 일도 없었던 터라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늘 병원 방문을 할 때는 남편이 함께 가주었는데, 당시 남편은 출장에 가있어 병원도 혼자 가서 놀랜 마음을 쓸어내리며 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했다. 검진을 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시던 선생님은 "아직 초반이라 태반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인데, 앞으로 2주간은 무조건 누워있으셔야 할 것 같아요. 출근도 안되고요. 제가 소견서 써드릴게요. 집에서도 꼭 누워만 계세요."


이게 말로만 듣던 '눕눕처방'이구나. 임신 중기쯤 경부길이가 짧아져 무조건 누워있어야 했다던 (경부 길이가 짧으면 조기양막파수를 비롯해 조산의 원인이 되고, 누워있는 것 밖에 답이 없다) 친구의 말과, 나의 상사분의 우려 섞인 말들은 그냥 '참고용'이었는데 막상 다른 이유더라도 눕눕처방을 받으니 순간 너무 무서워졌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비롯해 모든 연말 계획을 다 취소를 해야 했다.


우울해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전화로 위로를 해주었고 "걱정 마 나라야 나 내일 올라가니까 우리 집에서 재미있게 놀자"라고 토닥여주었다. 다음날 남편이 서울로 돌아왔고, 목이 칼칼하다며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자가키트를 하더니 그 전날 그가 주었던 따뜻한 위로 역시 지킬 수 없게 하늘은 또 다른 선물을 선사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빨간 두줄.  아니, 연말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고독연말'이라니... 내가 임산부란 이유로 그는 인터넷에서 허름한 자가격리 숙소를 찾아 출장짐을 풀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나갔고, 나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며 홀로 누워있는 시간을 보냈다.


나의 소식을 듣자마자 친정 부모님은 일주일치 먹을거리를 만들어 집 앞에 놓고 가셨고 (혹여나 우리 집에 바이러스가 있을까 봐 못 들어오시게 했다) 36살의 나는 여전히 부모의 사랑과, 헌신을 먹고 사는구나, 엄마아빠가 편찮으시면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오매불망 딸 걱정인 엄마의 사랑

크리스마스 연휴 때 계획해 두었던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하려고 한 젠더리빌, 하얏트 호캉스, 웨스틴 조선 호캉스... 연말 오피스 클로즈 때 잡은 점심 약속들은 모두 없었던 일이 되었고, 나는 인스타 피드에 올라오는 크리스마스 포스팅들을 보며 참으로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일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최대한 쉬려고 노력을 했고, 재택근무를 하는 나를 이해해 주는 동료분들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고양이를 벗 삼아 나는 매일매일 외로움을 달랬고 (이 시기 나는 내가 남편을 엄청 사랑하는구나를 깨달았다), 고마운 분들이 보내주신 선물과 메시지 덕에 기운을 차리며 지냈다.

밥 먹을 때, 잘 때... 24시간 내 곁을 지켜주는 고양이
'소울보따리'라는 곳을 운영하시는 라일락님의 귀한 선물

그렇게 기다리던 나의 '안정기' 진입은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시기 덕분에 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고, 남편과 나는 서로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었으며 남편에게도 항체가 생겨 더욱더 좋은 면역력으로 아이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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