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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 Days Feb 20. 2023

임신 중기의 기록 - 4 (23주)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싱글일 때 나는 결혼할 여자, 연애할 여자, 결혼할 남자, 연애할 남자 등을 구분 짓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런 남자와 결혼해라" 등의 글 역시 오지랖스럽다 못해 웃기다고 느껴졌다. 관계란 상대적인 것이고 형태가 얼마나 다양한데,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마냥 훈수를 두는 글들이 참으로 웃겼다.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는 어쩌면 내가 소위 말하는 결혼 전문회사등에서 외국에서 거주를 했단 이유만으로 자동 하위권에 랭킹이 되는 개념과 비슷한 어이없음도 들어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부모로부터 양육이 되었으며, 어떤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순히 "외국 거주" = 문란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몸에 타투까지 있으며, 대학교 때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오마이갓.. 정말 기피대상 1위가 아닌가..)


하지만 실제 내가 연애라고 인정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연애는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들어와 처음 시작했으며, 남자와 함께 간 해외여행은 남편과 결혼하고 간 허니문이 처음이었기에 그런 낙인과 오해가 참으로 억울할 따름이다. 물론 연애를 일찍 시작하고, 사귀는 사람과 해외여행을 간 것이 문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유독 여자에게 별도의 잣대를 대는 이 사회에 메롱을 하고 싶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상당히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남편의 책임감과 생활력이 좋았고, 이 남자와 함께 한다면 내가 모르는 지방의 동네에서 산다고 해도 이 사람을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의 오뚝이 같은 기지와 현실적이고 당당하게 두 발을 딛는 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런 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일궈냄에 있어 나의 능력과 판단을 신뢰하는 이 사람의 시각과 마음 역시 좋았다. 서로 든든한 자산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결혼을 하고 시간이 지나 임신을 하며 새로운 과정 속에서 나는 "좋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확신이 종종 들었다. <결혼할 좋은 남자>를 알아보는 법, 판단하는 법 등의 글을 버거워하면서도 누군가가 나에게 결혼생활에 대해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남편의 장점을 좋은 남편의 예로 들게 되었다. 남편의 무던한 성격, 다투지 않는 기질, 나의 부족함을 귀엽게 봐주는 눈,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이나 시간을 쏟지 않는 깔끔함, 예쁜 말투, 성실함, 집을 좋아하고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성향, 어른들에게 예의 바른 모습, 타인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무시하지 않는 성향, 그리고 소박한 정서 (예: 일본 만화와 식물, 고양이 등을 좋아하는) 같은 것. 남편은 확실히 결혼하면 더 좋은 남자이다.




임신을 하고 여러 이벤트를 맞이한 나의 정신적 지주는 늘 남편과 엄마였다. 하고 싶은 게 많고, 열정이 넘치던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여러 제약이 생기자 많이 속상해했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남편은 본인이 관심 있는 것 외에는 아주 무관심한 사람인데, 연애 때부터 늘 그는 "나의 관심사는 나라, 고양이, 일"이라고 이야기해 온 만큼 나에 대해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여자마음을 헤아리는 데 있어 세심하거나, 여러 표현에 능하진 않기에 연애할 때는 가끔 그의 마음을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난 지 곧 1000일이 되는 시점인 지금, 나는 이제 그의 마음의 패턴을 어느 정도 알아 그의 말속에서 작은 단서를 찾으면 벅차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주 남편은 친구와 오랜만에 퇴근 후 술 한잔을 기울이고 집에 오는 길에 전화를 했다. 대리기사님이 모는 차를 타고 계속 애정표현을 늘어놓던 남편은,  유독 기분이 안 좋아 남편에게 며칠 내내 툴툴거렸던 나를 토닥여주었다. 그러고 집에 와서 그는 나에게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나라 너는 정말 내 보물이야. 너와 결혼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 집에 오는 길이 너무 좋아. 오늘 친구를 만나고 다시 한번 느꼈어" 라며 나를 와락 안아주었다. 그러고 내 배에 대고 계속 뽀뽀를 하는데, 그의 까끌까끌한 수염이 배에 닿을 때마다 아팠지만 나는 뽀뽀를 하며 뱃속의 아기에게 사랑한다 외치는 그의 짱구 같은 옆모습을 보며 눈물이 났다. 그 순간만큼은 임신 중기의 고달픔이 눈 녹듯 사라졌다.  




무기력함과 재택으로 점철되었던 23주 속 나의 가장 큰 힘은 나의 남편이었고, 그는 참으로 좋은 남편이다. 비록 본인이 지나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기고 (열려있는 찬장, 켜져 있는 불, 쌓여있는 옷무덤, 랜덤 한 곳에 있는 옷 등), 스트레스를 잠으로 풀어 잠이 많아 가끔 계획해 둔 것들을 변경해야 하지만, 그런 것은 살면서 크게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좋은 남편인만큼, 좋은 아빠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기를 낳고 우리가 육아에 쪄들어있을 때에도 부디 그가 설레는 맘으로 집에 오기를!


그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쫓아다니는 나는야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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