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대한민국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보유국이 되었다.
2024년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 정말 찾아 왔다.
그야 말로, K-Culture의 최정점에 서게 된 것 같다.
마치 내가 스스로 수상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노벨상의 영예로움과 가치가 정말 높고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한강’작가 덕분에 잊고 있던 서랍 속의 저녁을 꺼내 보았다. ‘한강'작가의 저녁과 오늘 글 속의 저녁의 의미가 조금 다를 것 같지만, 우리가 꿈꾸는 저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의 글을 이어 가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한강’작가의 문학작품 중에서 시집의 제목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은 2000년 후반 출판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 역시 생계를 처음 시작하며 생업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저녁이 있는 삶, 저녁이 꾸는 꿈을 자주 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10년후반을 지나면 ‘한강 작가’가 여러 문학 작품으로 주목을 받으며 나도 몇몇 작품을 알게 되고,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시집도 접하게 된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그 제목의 시가 있을 것 같지만, 이 제목의 시는 만날 수 없고, 그 서랍 속 저녁의 의미를 곱씹어 보며 재해석을 하며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해 보았다.
‘한강’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산업화의 고도 성장기를 보내 온 눈부신 대한민국의 현재를 함께 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꿈꾸는 “저녁”은 어떤 “저녁”인가?
대한민국은 예로부터 외세의 침략, 전쟁에 늘 긴장 속에 살아 숨쉬어 왔고, 가금 아픈 일제의 식민역사와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분단국가를 경험하고 있으며, 군사 독재를 겪으며, 민주화와 동시에 경제선진국을 만들어 낸 대단한 역사를 가진 전 세계가 두목하는 국가다.
이런 역사로 성장하고 움직여 지는 가운데 생기는 국가와 조직운영의 효율성이 개인의 자율성보다 더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의 장점도 분명있다. 효율성 이면의 규모의 경제를 활용한 구매력이 크고, 그에 따른 가격 협상력이 좋아 비용이 절감되어 가격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운영의 효율성이 개인의 자율성을 압도했다. 그렇게 산업의 효율화, 성장의 확대,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굉장히 제한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저항이 크기에 그 누구하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런 분위기, 문화가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우리의 저녁, 개개인의 일상을 서랍 속에 넣어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랍 속에 우리의 일상을 잠시 넣고, 저녁이 주는 기쁨, 저녁에 꾸는 꿈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부모세대, 선배세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 문화에 조금씩 젖어 갔고,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효율성 중심의 시대가 낳은 꼰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렇게 십 수년이 흘렀고, 지금은 생활수준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소득수준, 경제상황, 문화수준, 교육수준, 여가생활 어느 것 하나 과거와 비교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다. 개인의 삶의 가치가 굉장히 중요해 졌으며, 시간의 활용 가치, 일과 삶의 균형, 삶의 질 등 시간과 일상에 대한 생각의 깊이, 활용의 정도가 매우 다른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자율의 MZ세대가 지금의 주류 세대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서랍 속 저녁을 다시 꺼내게 되었고, 그 저녁의 의미와 목적, 가치를 재해석하고, 재정의해 가고 있다.
저녁이 꾸는 꿈이 누구나 있다. 그 저녁이 어떤 저녁인지는 각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과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저녁이 되는지는 정답은 없다. 조직에서 역할과 책임을 하는 것도 맞을 수 있고, 개인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맞을 수 있고, 어떤 저녁이 꾸는 꿈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오늘 저녁이 꾸는 꿈을 다시 꾸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문화선진국민의 한 사람으로 ‘한강’작가 덕분에 서랍 속 저녁을 다시 꺼냈다. 그 저녁을 우리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목적이 이끄는 저녁이 되면 된다. 그 목적을 늘 잊지 않는 저녁이 되길 오늘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