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하다'와 '그럴싸한데'를 오가는 중
선호하지 않는 직업 중 하나가 CEO다. 성공하는 처세술을 보면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을 꿈꾸라고 하는데, "온갖 일을 다하고 어디 물어볼 곳이 마땅치 않은 곤란한 직업'이란 생각이 많다. 차라리 책사가 낫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둘 다 별로다. 3D가 아니라 둘 다 4D 직업이다. 입체적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스스로 현명한 생각이라고 자뻑할 때도 있고, 남들이 보면 덜떨어진 놈이란 소리를 듣기도 한다. 내가 선택한 직업을 통해서 해외 영업 말고도 제품 기획, 마케팅, 개발 기획, 사업기획, 품질관리, 제조, 물류, 구매, 재무, 인사 이런 일에 본의 아니게 경험해보고 든 생각이다.
지인 대표이사가 '너 참 요상한 놈이다, 회사 다니는 놈들 치고 이런 놈이 없는데'라고 해서 한참 웃었다. 좀 독특한가? 이것이 좋은 의미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조금 불분명한 사실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튼 희한한 일이다.
가끔 밥벌이를 하며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해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번은 부사장님이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가끔 이런저런 일을 맡게 된 것이 재능인지 저주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나만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아이들이 아이돌을 부러워하는 것도 그 결과만 보기 때문이다. 나이 먹어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인지, 철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일을 할 때 스스로 '그럴싸한데'라고 자기만족을 할 때가 많다. 그러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스스로 참 멍청하고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한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쉬지 않고 뭔가 대책을 찾으며 신세를 볶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일단 쉬자'와 같은 태도가 나올 때도 있다.
새로운 일을 만들면 계약, 구매, 물류, 영업, 협상, 사업기획, 제품과 솔루션 기획, 판매망 구축, 원가관리, PM(Products Manager & Project Manager), 마케팅일에 한 발씩 담그게 된다. 한 번쯤 다 해 본 일지만 한 번에 하게 되는 엄청 머리가 아프다. 아직 숙련되지 못한 결과다. 이러다 너덜너덜 해지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참 착한 팀장이 와서 폭산 늙었다고 놀리면 할 말이 없다. '모두 나 때문일까?'라는 생각도 들고, 건강 챙기라고 잔소리에 긴장감이 생긴다. '나 때'처럼 늙는 현상이 나오는 것 같다는 말에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할 때가 있지만 '당연하지. 시간 가는데'라는 정확한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밥벌이 와중에도 이런 희한한 여유는 어떻게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늙는 건가?
업체 사장님이 갑자기 찾아오신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다. 3시간 동안 자기 회사 일에 대한 질문과 답변, 의견을 말하다 보니 밥도 못 먹었다. 내 일의 입장에서는 별 의미가 없지만 또 이런 시간이 나쁘지 않다. 너무 한가로운가? 한가로움을 동경하지만 밥벌이를 하다 보면 이런 상황 참 어색하다. 이런 기분이 들면 뭔가 멍청하고 덜떨어져 보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팀장 녀석이 와서 '그만 좀 놀아요'라고 퉁을 주면 나도 입이 나온다. 말을 섞지 말아야지.
그러다 꽤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바람에 늦은 컵라면을 퇴근길에 먹게 됐다. 라면 먹다 갑자기 다른 업체 전무님이 연락 와서 사람을 구해달라고 하고, 또 여기저기 흥신소도 아니고 열심히 알아봐 드렸다. 소개해준 사람이 자리를 잡아간다니 참 좋은 일이다.
밥벌이를 위해 이런저런 일들 한다고 쓰고 있지만, 아무리 작은 작은 가게 주인도 다 혼자서 알아서 한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너무 바쁘게 살아가다, 조금 여유로워지는 것을 사치라고 해야 할지 익숙하지 않다. 다들 높은 급여와 좋은 조건을 지양하지만 높은 급여는 골병들 일이 많고, 좋은 복지 조건은 사용할 시간도 부족하다. 가능하면 본인이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선택해야 이것저것 잡부처럼 해보며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마나님에게 해 봐야 특별한 조언이라고 "결국 본인 맘대로 할 거면서"정도다. 종종 내가 잘하고 하고 싶은 것과 좋은 조건을 저울질하는 기준을 보면 스스로 멍청하거나 그럴싸해 보이거나, 바보인가? 그런 생각이 교차한다. 비범과는 거리가 멀고, 일반적인 것도 거리가 멀다. 결론은 머리만 아프다. 현명한 처신인지 멍청한 짓인지는 내가 만들어 낸 결과로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심각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면, 어깨 위에 달린 물건의 용량이 썩 좋지 못하다는 생각과 나이가 들며 생기는 '깜박증'이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만 정확하다. 그나마 무엇을 시간 순서에 맞게 기록하고, 정리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현재 하는 일이 사건 사고 없이 잘 굴리고 있는 것도 다행이지만 또 익사이팅한 상황은 자연재해처럼 언제 올지 모른다. 주변 분들에게도 감사한 일이 많지만 인사도 못하고 살 때가 많다. 6개월 정도 소요될 일을 3개 월에 대강 철저히 맞추고 있다. 잘 되느냐는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고 내 역할을 충실히 해야 후회가 적다. 아무리 잡부처럼 온갖 일을 해도, 자부심마저 져버릴 수는 없으니까.
진행 프로젝트가 잘 돼가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조금 떨어져 전체 프로젝트 진척 현황을 보면 맘에 안 든다. 부족한 것이 항상 눈에 띈다. 조울증 환자가 따로 없다. 그나마 옆에서 나를 보는 녀석이 전보다 엄청 좋아졌다는 말에 힘이 난다. 내가 예전에 그렇게 또라이였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러다 후회를 했다. 물어볼 녀석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잘못 물어본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랄까? 이 말을 했더니 잔소리가 어찌나 많은지 또 후회를 하게 된다. 살면서 제대로 질문을 해야, 듣고 싶은 답을 들을 확률이 높다. 몇 일째 코딩과 대전쟁을 하는 동료의 멘붕 사태가 갑자기 위안이 된다. 내가 좀 못됐나 보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서 그런가. 하는 일이 다를 뿐이지 비슷한 상황은 도처에 있다.
하루 종일 멍청한가, 그럴싸한가를 생각하며 이런 일 저런 일을 처리해 나갔다. 기다리던 업체 회신이 안 와서 전화를 했더니 어제 보냈단다. 다시 이메일을 받아서 확인하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업체 방문을 하러 가면 뭐라도 좀 사가려고 가게에 들렀다. 가게 할머니가 투표했냐고 계속 물으신다. '어르신 우리 번호가 다를 거 같은데요?' 했더니 "에휴 아니구먼'하시며 눈을 살짝 흘기신다. 포장을 하시며 '그런데 왜 다른 거야?'라고 꼬치꼬치 물으신다. '사람이 뭐가 중요해요. 그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 내 이익보다 자식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에 투표하려고 해요'라고 했다. 뒷자리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신다. 미팅 잘 끝나고 돌아가다 다시 본 할머니한테 "많이 파세요~"라고 했더니 환하게 웃으신다. 그럼 됐지 뭐.
하루 종일 혼심을 쓸데 있는 일에 쓴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멍청한가'와 '그럴싸한가'의 생각에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했더니 혼이 나간 것 같다. 젊었을 때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자기가 관심 있고 해보고 싶던 분야를 생각만 하지 말고 체험하고 도전하는 말로 이해한다. 이런 말은 혼이 나간 시점에 왜 떠오르는 거야. 이렇게 산만한 날이 가끔 있다.
다들 나이가 들고 좋은 날에 좋은 말을 한마디씩 한다. 그런 일이 당연한데 참 드물다. 늙어본 적은 없고, 젊어본 적은 있으니 나이가 들어가면 혼선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닌가? 후회의 총량은 나이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축적에 후회의 총량을 줄이는 것은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뭔가 해보는 것이다. 세상 일이 다 내 맘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요즘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멍청한 계획과 달리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그럴싸하게 만들어가는 중이다. 미국엔 잡스가 있었고, 한국엔 잡부가 있지.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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