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 좋은 개발자랑 일해본 기획자가 느낀 점
개발자 대우가 워낙 좋으니 은연중에 내가 을의 포지션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예전 회사에서는 개발자의 연봉을 비개발자의 연봉보다 대놓고 2배 더 올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업무 자체가 개발자가 구현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발자에게 부탁하는 모양새가 되곤 했다. 그래서 어쩌면 기획자의 역할은 개발자를 어화둥둥 다루며 원하는 프로덕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다루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개발자가 내 기획서를 다 읽지 않아도, 혹은 내 발표를 건성으로 듣고 나중에 딴소리를 해도, 나는 기획자로서 나의 자질을 반성하였다. 내가 더 설명을 잘했으면 이럴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개발자와 더 빨리 친해지기 위해서 먼저 다가가서 커피타임을 하자고 조르기도 했다.
오죽하면 '오늘도 개발자가 안 된다고 말했다'라는 책이 나왔을까.
그런데 이직한 이후에 새로운 회사에서 하게 된 첫 기획 발표에서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의 기획서 발표를 마친 뒤에, 개발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발표를 들으면서 가슴이 뛰었다.
이 프로젝트가 재미있고 의미 있는 도전이 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사용자의 동선을 더 발굴하는데 좋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획자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준비를 했다는 게 느껴졌다.
개발자분은 이 기획을 해야 하는 이유와, 이게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공감해주셨다. 그러니 기획자가 시켜서 개발하는게 아니고, 그 의미를 알고 자발적으로 개발하게 되지 않을까.
예전에는 내가 개발자를 북돋아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회유하고 설득했다면, 이번엔 반대로 오히려 내가 개발자한테 더 자극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내가 한 고민의 시간을 칭찬해주시니, 나를 기획자로 인정하고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 3년 동안 일하면서 개발자한테 기획 리뷰를 할 때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었나? 오히려 너무 많은 양을 준비해 가면, 이 정도를 다 개발하려면 기간을 늘려야 한다라거나 이것까지 구현 불가능하다는 피드백을 밥먹듯이 받아왔었다. 그게 너무 당연했던 내게 이번 피드백은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 리뷰가 끝나고 담당 메인 개발자 두 분이 내가 작성한 기획서를 스터디하듯이 샅샅이 정독하고 학습하셨다. 이 기획을 구현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지 다방면으로 고민하면서, 거기에서 생기는 질문을 나에게 역으로 해주셨다. 내가 설명이 미흡한 부분이나 오해할만한 두루뭉술한 설명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 빠짐없이 질문하였다.
사실 이분들은 담당자로 배정되자마자 이 프로젝트를 위해 사전 공부를 하셔서, 내가 발표하기 전부터 자신이 공부한 것을 토대로 하면 어떤 점이 우려되는지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한 피드백을 주셨다. AS-IS 버전에서는 구현이 이러이러하게 되어있는데 이런 부분까지 고려하고 기획하고 있는지를 여쭤보셨던 분이었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긴장이 되었다. 아, 대충 해선 안 되겠구나. 내가 이 사람들한테 힘을 받은 만큼, 나도 이 개발자분들이 의지할 수 있는 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개발자가 갑이고, 기획자가 을이라는 것은 어쩌면 틀릴 수 있겠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하면 갑과 을로 나눠질 수 없었다.
태도가 좋은 개발자는 바로 이런 분들이 아닐까. 이런 분들이랑 일해서 기쁘고, 좋은 동료가 최고의 복지라는 말이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설령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더라도, 이분들과 일하면 그 과정에서 많이 배우고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