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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Nov 26. 2023

Hi!

달라 달라 2

  'Are you enjoying that book?'

  4년 전 R을 만나러 하와이에 왔을 때 혼자 서점에서 시간을 때운 적이 있다. R의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서 R을 기다리는 동안 서점에서 베이킹 책을 둘러보고 싶었다. 얼마 전에 서점 구경을 R과 함께 갔을 때 흥미로워 보이던 책들을 보면 딱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R 말고는 모든 이가 낯선 이들 뿐인 이곳에서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예상도 기대도 하지 않던 상황이라 서점의 지나치게 낮은 에어컨 온도도 내 식은땀을 막지 못했다. 두피에 땀이 차는 가 싶더니 이내 등과 겨드랑이에 맺히는 것 같았다.

  남아시아계로 보이는 낯선 이는 내 주변에서 책을 고르는 것 같더니 정말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온 거다. 영어로 된 두꺼운 베이킹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당연히 영어를 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두꺼운 책의 반은 완성된 제품 사진으로 채워진 걸 낯선 이는 간과했다. 사진 위주로 보고 있던 나는 대충 간단한 답변을 했고, 책에 굉장히 몰입하고 있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낯선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다. 지금은 4년 전보다 영어실력이 늘었지만 그땐.. R과도 파파고로 대화하던 때라서 낯선 이 가 빠르게 뱉어내는 영어를 알아들을 재간이 없었다.

  최대한 미안하지만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Sorry, I can't speak english well.'이라고 마법의 주문을 걸어봤다. 제.. 제발..!

  하지만 나는 낯선 이를 쉽게 생각했던 거다. 

  '괜찮다.'라고 시작된 그의 프리토킹의 다음 문장들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계속 뭔가를 이야기했다.

  결국 이 상황은 겨드랑이가 미끈해질 정도로 땀이 흐른 후 R이 내게 왔을 때 종료됐다.


  그리고 R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파파고로 다급하게 서점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낯선 사람과 가볍게 이야기하는 게 흔하진 않지? 미국에서는 꽤 자연스러운 상황이야.'

  R의 대답 이후로 재밌는 경험이기도 했지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를 설명하며 한참을 떠들었다.


  지금도 가끔 낯선 이 들은 가감 없이 말을 걸어온다. 이런 상황이 있을 때마다 여전히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만 어떤 말을 할지 몰라 긴장되기보단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오는 긴장에 가깝다.

  

  얼마 전 다이아몬드헤드를 다녀왔는데 구글에서 찾아본 초록초록한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이 꼭 겨울에 볼 수 있는 풍경처럼 식물들이 바짝 말라서 온통 누르스름하지 않겠는가. 이때 하와이에도 건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을, 겨울이 우기라서 그때 구글에서 보이는 푸릇한 다이아몬드헤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풍경은 영락없이 겨울인데 정수리가 탈 것 같이 쨍쨍한 여름 날씨라니 참으로 오묘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R에게 물었다.

  'So much dry because not raining season right now, right?'


  그런데 낯선 목소리가 대답해 오는 게 아닌가?

  'Because dry season now.'

  백인 여성 둘이 우리 뒤를 따라 오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R에게 한 질문에 대신 답하다니? 

  저기요 당신네들한테 질문한 게 아닌데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누구도 원하지 않는 답을 하더니 우리를 앞질러 와구와구 걷는 모습을 보며 벙졌다.

  R에게 쟤 왜 저러는 거야? 물었더니 그냥 미국 스타일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그러려니 넘어갔다.

  아. 그날 R과 나를 제외하곤 하이킹에 어울릴만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가 관광객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뭐 어쨌든, 이런 문화는 여전히 익숙하진 않다. 여기서 조금 더 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재밌기도 하다. 복실이와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일면식 없는 이웃을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들은 먼저 인사하기도 한다. 아직, 내가 먼저 인사하는 건 여전히 어색하지만 정말 신선한 경험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인사하는 이들의 얼굴은 보통 웃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인사하는 건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다.

  

  운전면허가 없는 나는 하와이 오자 마자 자전거를 사고 싶었지만 가성비 좋은 26인치 월마트 자전거의 재입고를 여러 번 기다리다가 최근에야 살 수 있었다.

  R이 학기를 시작하면서 오전만 수업이 있는 날은 복실이를 맡겨두고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했고 며칠 전에 드디어 알라 모아나 해변까지 자전거로 다녀왔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 자전거를 탄 중년의 백인이 마주 보며 오고 있었는데 경쾌하게 'Hi!' 인사하지 않겠는가.

  작은 조각들이 모여 완벽한 하루를 만드는 날이 있다. 알라 모아나 해변을 자전거로 다녀왔던 그날이 그랬다. 낯선 이의 짧은 겉모습을 보고 타국에서 긴장을 늦추면서 살게 됐어요 세상은 아름다워요.라고 하기에 나는 때가 많이 묻었고 덕분에 현명하게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즐거운 상황 자체를 즐기지 못하면 말라죽을 거다. 이렇게 건강한 자극은 일상의 단 맛이 된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우리네 인생에서 극적인 일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잔잔함 속에서 행복을 먹으며 지내야 비극을 당해도 조금씩 회복될 거라는 학습으로 살아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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