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중국인 집주인 4
매달 1일은 월세 내는 날이다.
하와이에서 지낸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 이 소란스럽고 귀여운 집의 월세를 낼 때가 됐는데 집주인이 도통 얼굴을 비추질 않았다.
한국에서는 월세를 계좌이체로 간편히 지불 하는데 여긴 백지수표를 써서 월세를 내는 방식이다. 사용자 이름, 금액, 날짜, 받는 사람 이름 정도의 정보를 수기 작성해서 매달 1일에 집주인에게 직접 전달해야 한다.
매달 한 번씩은 집주인 얼굴을 대면해야 하는 부담감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방식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나에겐 이 방식이 여간 성가시러운 게 아니다.
그렇게 백지수표를 작성해서 집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영 오지 않기에 R이 문자를 보냈다. 그녀의 대답은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그즈음에 방문하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우리를 물 먹인 게 벌써 세 번째.
하지만 중년의 중국인 집주인의 답장에서 월세를 왜 1일에 받으러 오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백지 수표로 월세를 내면 내가 4.5% 세금을 떼어야 하니까 현금으로 준비해 줄래? 네가 백지 수표로 월세를 지불할 수 있지만 그럼 네가 세금까지 함께 지불해야 해.'
이게 뭔 개소리일까? 역시나 계약서 작성 당시 전혀 없던 말이었다.
그래서 R은 바쁜 일정에도 근처 은행에 가서 현금을 찾아와야 했다. R은 현금을 찾을 때 늘 창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꽤나 긴 시간을 써야 한다.
집주인은 상대방을 기분 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월세를 받으러 집주인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처음 대면하는 거였다. 얼굴에 욕심이 그득그득한 중년의 모습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해서 약간 놀랐다. 속으로 역시 얼굴로 사람을 짐작하면 안 되는구나 진리를 다시금 되뇌고 있을 때 집주인이 복실이를 안고 있는 내게 몇몇 질문을 했다,
집주인의 질문들을 들으면서 R이 이 집을 구경하러 왔을 때 질문 폭격을 하던 그녀에게 수모를 겪어야 했던 순간이 떠오르면서 R의 마음이 어땠는지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뭐가 그렇게 다급한지 질문을 하고도 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 질문한 하는 식이다. 사적인 부분도 가감 없이 질문을 하는 집주인은 직설적이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하다.
월세 이벤트 이후로도 그녀의 오락가락 바뀌는 말로 작은 이벤트들을 치러야 했는데 벌써 몇 차례 당해보니 집주인의 방식에 무뎌진 건지 이제는 짜증이나 열을 내지 않고 '하. 하. 그랬겠지'이렇게 넘겨버린다.
외부 스트레스에 취약한 유리 멘탈인 나는 집주인의 방식을 긴장감 없이 받아들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름의 방식을 터득하게 되어 다행이다.
그래서 이제는 집주인이 무슨 얘기를 하던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됐다. 그녀의 영어를 들어보면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집주인의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나라에 와서 악착같이 쉼 없이 일했기에 이 모든 걸 이뤄냈겠지. 그래서 한편으로는 대단하기도 하다.
그녀의 말에 악의는 없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악의가 없다고 해도 그녀가 편리한 대로 일처리 하는 방식이 누군가에게 피로감이 되지 않는 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집주인과 이 집에서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큰 위로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