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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K.

스팸 잼 축제/싱코 데 마요/다운타운 데이

by 에포케 Feb 05. 2025

-스팸 잼 축제 (Spam Jam Festival)

  '이런 축제도 있어?'

  약혼자 비자로 입국해서 임시 영주권 신청까지 정신없이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다가 받은 추가 서류요청 레터에 머리가 한 번 터진 후, 다시 꼼꼼히 서류를 준비해 보내니 벌써 10월이 됐다. 10월 초부턴 할로윈 분위기로 장식한 대형 쇼핑몰부터 동네 카페까지. 연달아 있는 10~12월의 큰 행사들은 들뜬 연말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새해 연초까지 3개월 동안의 시간은 평소보다 배로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괜스레 바빴던 모든 일정이 끝난 후, 2024년 초가 돼서야 하와이에 수많은 축제들이 불현듯 스친다.

  '자기야 여긴 거의 매달 축제 있지 않아?'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정신없이 지나온 반년 동안에도 놓친 크고 작은 지역 행사들. 다는 힘들더라도 시간이 되면 꼭 가고 싶은 축제, 행사들을 달력에 메모한다. 일 년 동안 있을 하와이의 크고 작은 축제, 행사를 모아둔 웹사이트를 찬찬히 살피던 중 4월에 있는  'Spam Jam Festival'이 눈에 들어온다.

  신기하네? 이런 흥미로운 축제가 있어. 스팸처럼 가공된 육류를 전혀 즐겨 먹진 않지만, 스팸으로 만든 다양한 메뉴와 스팸 관련된 굿즈들 그리고 공연까지. 유쾌해 보이는 이 축제를 꼭 경험해보고 싶어진다.

  특히나 야외 행사들은 복실이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관심이 간다.


  그러고 보니 스팸 관련 행사를 하와이에서 주최하는 게 아주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다. 스팸 무스비가 대표적인 하와이 음식으로 자리매김 함으로써, 스팸은 그저 그런 식재료가 아닌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상품이기도 해 여러 디자인 제품의 캐릭터로 사용되는 아이코닉한 음식이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보급받은 식재료로 만든 우리나라 부대찌개처럼, 하와이에 사는 일본인들이 스팸을 활용한 주먹밥인 스팸 무스비가 생겼다고 한다.


  와이키키 해변 메인 도로를 일부 통제해 열리는 이 축제는 오후부터 저녁까지 진행된다. 우린 역시나 알라 모아나 쇼핑센터에 주차 후 와이키키 해변까지 걸어갔다. 우리가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노을 지던 해는 와이키키 메인 거리 초입에 다다랐을 때 이미 지고 어둑어둑 해졌다. 잔뜩 기름진 냄새가 벌써 거리 초입까지 열심히도 타고 왔다. 제 아무리 요란스런 음악소리라도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를 덮어내진 못한다. 우리도 곧 그 무리에 합류해 들뜬 목소리를 더한다.

  축제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인파와 푸드트럭에 선 긴 줄에 트럭마다 어떤 메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쉽진 않았다. 그래도 이 모든 게 재밌어 그저 들뜨기만 했고, 그중 우리가 처음 시도한 메뉴는 이름도 무시무시한 'Deep Fried Spam Bomb'. 밥 사이에 자른 스팸을 넣고 김으로 말은 후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음식이다. 튀긴 건데 뭔들 안 맛있겠냐 만은, 음식과 함께 준 소스가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소스가 없었으면 그냥 맨밥에 스팸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특별하지 않은 조합이고, 축제니까 사 먹을 법한 메뉴였다. 그렇게 조금씩 축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여러 부스와 푸드트럭이 즐비했는데, 스팸이 더해진 멕시코 음식을 파는 푸드트럭은 벌써 매진된 메뉴도 있었다. 이미 매진되어 먹을 수 없는 메뉴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거두며 여러 푸드트럭을 탐색하다가 베트남 음식 부스에서 튀긴 돼지고기 꼬치를 주문 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앉아서 먹을 곳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부스 뒤편의 건물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R과 꼬치를 번갈아 가며 나눠먹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여기도 찍어먹으라고 함께 준 칠리소스가 기름에 튀겨 느끼한 돼지고기 맛을 잡아준다.


  와이키키 해변 야외무대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훌라 공연 음악과 관객들의 환호성에 잡힐뻔한 발목을 움직여 아직 덜 채운 배를 먼저 채우려 어디 재밌는 메뉴가 있는지 둘러보다 찾은 붕어빵! 팥 붕어빵과 스팸 크림치즈 붕어빵 두 가지 맛을 각각 하나씩 주문하려 보니 정말 긴 대기 줄 끝에 R과 함께 섰다. 붕어빵 말고 다른 메뉴들도 있었지만 특히나 음료 손님이 많아 대기 줄이 길었던 모양이다. 붕어빵 하나씩 손에 들고 지나왔던 길에 있는 여러 푸드트럭을 한 번씩 더 살펴보며 훌라 공연을 보러 야외무대로 향한다. 무대에 다다랐을 때부터 조금씩 내리던 비는 조금씩 굵어지지만 무대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댄서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와이안 음악에 맞춰 우아안 훌라춤을 선보인다.

 

  하와이에서 살면서 훌라 공연을 자주 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큰 행복이다. 부드러우면서 강렬한 몸짓은 우아하기도 하지만 자연을 귀히 여기고 신을 섬기던 폴리네이시안들의 순수한 영혼이 담긴 몸짓, 폴리네이시안들의 정체성 그 자체다. 훌라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서 이상하게 목이 메고 벅차오른다.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한 민족의 정체성인 훌라춤을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하와이섬으로 이주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훌라춤을 이교도, 선정적인 행위라며 금기시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완전한 밤이 찾아와 어두워진 야외무대를 밝히는 조명 주변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세차지지만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인 걸 알기에 복실이를 품에 안고 R과 한참을 서서 공연을 봤다.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에 공연장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던 길 아직 배가 덜 찬 R이 스팸을 넣고 만든 달달하고 짭조름한 빵 하나를 사 먹었다. 와이키키 거리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보단 한산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푸드트럭의 메뉴를 살펴보기도 지역 상품, 핸드메이드 제품을 판매하는 부스에서 제품들에 관심을 보이며 거리를 걷는다. 이렇게나 많은 방문객들 그리고 푸드트럭이 많은 것치고 깨끗한 거리. 곳곳에 잘 설치된 쓰레기통과 자원봉사자 혹은 청소 노동자분들이 축제가 열리는 동안 관리를 잘해주신 덕에 쾌적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던 거겠지.


  어느 푸드트럭 보다도 긴 대기줄이 늘어 선 거대한 모형 스팸의 포토존에서 가족사진까지 야무지게 찍고 유쾌하기 그지없는 스팸 잼 축제장을 나가며 축제가 어땠는지 음식은 어땠는지 R과 얘기를 나눈다. 집 가는 길인 걸 알고 신난 발걸음의 복실이에게는 곤욕이었을 축제였을 테지만.

  스팸을 사용한 신선하고 기발한 메뉴가 있길 기대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메뉴는 거의 없었다. 아마도 즐겨 먹지 않는 식재료라는 게 흥미가 생기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일 테지만, 축제장 음식 가격은 어느 나라를 가나 일반 음식에 비해 1.5~2배 비싸다는 걸 실감하곤 식욕이 저하된 연유도 있다. 가격이 비쌀 걸 예상하고 갔지만 가격표를 실제로 봤을 때의 받은 충격의 반응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예상 예방주사는 무용지물이었으니까.

  여하튼 이 유쾌한 축제를 즐기며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으니 이걸로 충분하지.

  두 번은 안 가도 될 것 같지만!



 -싱코 데 마요 (Cinco de Mayo)

  5월 5일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지만, 멕시코와 미국에 사는 멕시칸들의 기념일이기도 하다. 달력을 보며 5월 5일 숫자 밑에 작은 글씨로 적힌 'Cinco de Mayo'를 가리키며 R에게 물으니, 대충 멕시칸들의 유명한 기념일이라고만 말하고 어떤 걸 기념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1862년 멕시코 푸에블라 주에서 프랑스 제국을 물리친 전투를 기념하며 생긴 날인데, 미국 그리고 멕시코에서도 공휴일로 지정된 기념일은 아니어서 현충일처럼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는 진지한 날이기보다 재밌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느낌이 강하다고 한다. 이 날은 미국에서 맥주 판매량이 슈퍼볼 다음으로 높다는데 아마도 하와이보단 본토에서 크게 열리는 행사인 듯하다. 하와이에 거주 중인 히스패닉은 10% 정도로 거의 20%가 육박하는 미국 본토보다 훨씬 적은 수치이기 때문에, 주로 와이키키 메인 거리에서 진행되는 하와이의 대표적인 축제에 포함되진 않고 소규모 축제 중 하나이다.

  매해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진 잘 모르겠지만, 2024년은 알라 모아나 쇼핑몰 근처 'Harbor night market'이라고 푸드트럭이나 마켓이 열리는 공터 겸 주차장에서 싱코 데 마요 축제가 열린다. 장소는 좋은데 근처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축제장 주변을 몇 번 돌다가 결국 알라 모아나 쇼핑몰에 주차 후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축제장으로 복실이와 함께 걸어 들어갔다.

  라이브로 연주되는 멕시코 음악에 홀려 공연 관람객들 사이에 복실이를 품에 안고 자리를 잡고 공연을 즐기다 보니, 주차를 마치고 온 R에게 연락을 받고 R과 함께 공연을 조금 더 보다가 이내 자리를 옮겨 축제장을 둘러봤다. 그런데 한참을 내 품에 있다가 걷기 시작한 복실이와 몇 발자국 가지 않아 어떤 백인 젊은 여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우리에게 걸어와 뭐라 뭐라 말한다.

  처음엔 복실이를 보고 귀엽다며 말을 거는 흔한 상황인 줄 알았지만, '너 이렇게 더운 한낮에 네 강아지를 걷게 시키면 애들 발바닥이 얼마나 뜨거운 줄 아니?' 대충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이 젊은 백인 여자가 이 축제에서 강아지와 함께 다니는 모든 보호자를 붙잡고 이런 얘기를 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귀찮다는 어투로 '어~ 알겠어~ 알겠어~'를 시전하고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백인 젊은 여자는 부모로 보이는 백인 노부부와 함께 축제에 온 듯했고, 노부부는 그녀를 그냥 무표정하게 지켜볼 뿐 더 거들거나 제지하지도 않았다.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이 길거리에서 이렇게 공격적으로 자신의 옳음을 강요하는 상황은 난생처음이라 어이없고 기분이 뭣 같았지만, '아, 이게 그 유명한 Karen을 만난 건가.' 싶었다. 'Karen' 미국에서 유명한 속어로 무례한 요구 및 권리를 주장하는 중산층 백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솔직히 이 경험을 또다시 겪고 싶지도 않고 이 날의 일정을 망칠 뻔할 정도로 화가 많이 났다. 하지만 비상식적이고 무례한 낯선이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이 즐거운 시간을 망치게 두고 싶지 않아 기분도 환기시킬 겸 R과 축제장을 거닐면서 Karen을 신랄하게 욕하고 털어버렸다. 이런 사람들 앞으로도 또 만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지 연습도 했다.

  축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주로 히스패닉계 사람들이었지만 나 같은 동양인, Karen과 같은 유러피안 아메리칸, 폴리네이시안 아메리칸, 아프리칸 아메리칸 등등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축제를 즐기는데 쉼 없이 흘러나오는 멕시코 음악이 축제의 들뜬 분위기를 주도하며 역시 빠질 수 없는 술이 이들을 무르익게 만들었다. 술을 판매하는 푸드트럭들이 모인 곳은 다른 곳과 구분을 해 신분증을 검사하고 형광색종이팔찌를 채운 사람만 이용할 수 있다. R과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 팔찌는 필요없었지만, 어떤 음식을 파는지 궁금해 알콜존으로 들어가 둘러보다 딱히 흥미로워 보이는 메뉴가 없어서 돌아나가 푸드트럭 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타코를 사들고 야외용 테이블이 있는 알콜존으로 다시 들어가 빈자리가 있는지 둘러본다. 그리 넓지도 않은 장소인데 조금 둘러보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다 먹으려고 보니 벌써 해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축제에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 덕에 사람들은 대부분 어딘가 걸쳐 앉을 있는 곳이라면 손에는 음식 접시를 받쳐 들고 빼곡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꽤 널찍해서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야외 테이블 하나에 백인 가족이 앉은 마주 본 자리가 비어있는 게 보였다. 합석이 괜찮은 지 물은 후 드디어 앉아 타코를 한 입 베어문다. 바람이 좀 있지만 맑은 날씨라 싸늘하진 않았는데 해가 저물면서 바람도 더 강해지는 듯싶더니 R이 비운 타코 접시가 앞에 있는 백인 가족들에게 타코 부스러기를 날리며 날아 간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고 미안하다. 다행히도 타코 접시가 테이블 바깥으로 날아가면서 그들의 옷을 더럽히거나 큰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몇 번이고 사과한 후, 내가 타코를 거의 다 먹을 때쯤 8명 정도 되어 보이는 한 무리가 우리 옆자리에 합석해도 되는지 물었고, 빠르게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일어날 필요 없어. 괜찮으니까 천천히 일어나렴.'

  '아니야. 나 방금 다 먹었어.'

  '오, 고마워.'


  타고 3개로 채워질 리 없는 배를 이번엔 줄이 가장 긴 푸드트럭에서 주문을 기다린다. R의 졸업식이 끝난 후 멕시코 식당에서 처음 마셔본 '오르차따(Horchata)'가 너무 맛있어서 남은 음식 포장할 때,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던 직원이 테이크아웃 잔에 리필까지 챙겨줘서 고맙다며 함박웃음까지 지었던 우린데, 이 푸드트럭에 하와이의 특산품 중 하나인 타로로 만든 '타로 오르차따'를 판매 중 아닌가..? 좋아하는 것 두 가지가 섞이면 기가 막힐 거라는 흥분감에 일단 줄을 섰는데, R도 처음 보는 멕시칸 음식을 메인으로 판매하는 것에 흥미가 생겼는지 유심히 살펴보더니 '타말(Tamales)'도 함께 주문하기로 한다. 옥수수 반죽을 옥수수 잎에 찐 옥수수 빵과 고기와 곁들여 먹는 음식인데, 달짝지근한 한국식 옥수수 빵을 생각했던 나는 기대감에 한입 크게 먹었다가 멕시코식 옥수수 빵과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 동양에서도 밥 지을 때 설탕을 넣지 않듯, 유럽 빵도 거친 곡류를 담백하게 만들어 식사하는데, 식사에 사용되는 멕시코 옥수수 빵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어야지, 으이구. 하지만 왠지 익숙한 맛이기도 했는데 빵 식감의 나초 같았다. 주재료가 같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데, 나초맛 빵 식감이 낯선 나에겐 굉장히 이국적인 음식느낌을 받아서 처음 멕시칸 축제를 즐기는 내겐 오히려 이들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어떤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 보는 것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축제는 계속되는데 우린 먼저 일어난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저녁시간부터는 편한 옷차림으로 우리만의 공간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안심이 되는 Indoor person이기 때문에, 야외활동을 웬만하면 저녁시간 이전에 끝나는 R과 나.

  

  차창 밖, 이제 막 할 일을 다 마치고 뉘엿뉘엿 지는 해가 분홍과 보라의 중간쯤 되는 오묘한 색과 붉은빛의 주황색으로 물들이며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Karen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Karen. 


-다운타운 데이

  '우리 언제 자기 쉬는 날 다운타운 구경하러 갈까?'

  이올라니 궁전, 카메하메하 대왕 동상 그 뒤로 있는 하와이 주 대법원과 사법부 역사센터(Ali'iolani Hale)를 중심으로 오아후 섬에서 가장 오래되고 하와이 왕족의 예배당이었던 카와이아하오 교회, 유명인사들이 묵었던 오래된 호텔을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Capitol Modern을 비롯, Washington Place, 하와이 미션 하우스 뮤지엄까지. 이 밖에도 오래된 건축물들이 자리한 다운타운은 관광객들의 주요 시티투어 장소 중 하나다.


  하와이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R에게는 이 모든 게 익숙한 풍경 중 하나라서 다운타운에 위치한 하와이의 역사적인 장소를 둘러보고 싶은 흥미가 없었다. 언젠가 군산으로 간 여행에서 군산의 역사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시대가 담긴 오래된 건축물들이 잘 보존된 근대화 거리를 보고 이사까지 갔지만 정작 군산 주민이 되었을 땐 먹고살기 빠듯해 근대화 거리를 자주 방문하지 않았던 나처럼 말이다.


  뜨거운 한 낮을 피해 우리 세 식구는 다운타운으로 향한다. 다운타운은 마땅한 주차장이 없어서 유료주차를 할 수밖에 없던 R은 St. Andrew's 학교에 차를 세웠다. 상당히 비싼 주차비용을 지불했으니 두 번 다시 이곳에 주차하지 않을 거다. 한풀 꺾였지지만 아직까진 강렬한 햇빛을 피하려 그늘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카메하메하 대왕 동상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을 가리키며 연신 멋있고 웅장하다고 R에게 조잘조잘 말한다. 동상에 다다랐을 땐 우리 밖에 없었지만 다운타운의 유명한 명소인 만큼 금세 동상 사진을 찍으며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셀카봉이 없는 우리는 동상과 세 식구 얼굴이 잘 나오게 찍으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고 동상 뒤편에 자리한 하와이 주 대법원을 둘러본다.

  관람시간이 지나서 출입구 문은 이미 굳게 닫혀있었지만, 건물 외벽에 건물의 간략한 역사와 개방시간을 확인하고 R과 단 둘이서만 다운타운 구경을 또 오자는 약속을 했다. 사실 동상 뒤로 멋들어진 건축물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 몰랐는데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하와이의 법률 역사를 관람할 수 있어서 꼭 내부를 둘러보고 싶었다.(하와이 주 대법원 건물인 Ali'iolani Hale의 1층에 사법부 역사 센터인 King Kamehameha V Judiciary History Center는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동상 왼편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카와이아하오 교회가 보이지만 외부수리 중인 교회를 들어갈 순 없어서 교회 옆 낮은 담벼락을 따라 건물 외관과 화려하진 않지만 잘 가꾼 정원을 구경하며 걷다가 이올라니 궁전이 있는 도로 건너편으로 건너간다. 하와이의 온화하고 강수량이 충분한 날씨 덕에 무럭무럭 자란 거대한 나무들을 도심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이올라니 궁전의 초록이 무성한 넓은 앞 뜰에도 있는 거대한 나무들을 따라 걸으며 고목의 나이가 어떻게 될지, 수십 년을 궁전과 함께 했을 나무들의 그늘 아래를 지나가다 보면 궁전의 게이트가 나온다. 복실이와 함께 한 우리는 게이트 바깥에서 궁전을 바라보며 기웃거리다가 발길을 돌려 목적지 없이 다운타운 거리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걷는다. 지난번 들렀던 Capitol Modern 미술관 외관도 슬쩍 둘러보고 YMCA 건물도 주변을 걷다가 주차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평일이지만 이미 오후 6시가 다 되어 가는 느지막한 시간이라 학생이나 교직원이 없는 조용한 St. Andrew's 학교는 엠마 여왕이 세인트 앤드류 대성당을 설립한 후, 1867년에는 하와이 소녀들을 위한 양질의 교육을 위해 세인트 앤드류 수도원 여학교를 설립한 것이 지금의 학교로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200년이 훌쩍 넘은 건물이지만 오늘날까지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라 그런지 보수관리가 잘 되어 웅장한 성당의 모습은 국민의 주권과 미래를 진심으로 염려하던 엠마 여왕의 강인한 마음처럼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25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킨 이 학교의 건립 이후 주변은 얼마나 많은 변화와 사건들을 거쳤을까.

  괜스레 시답잖은 생각이 사려로 접어든 채 차에 올라 타 복실이를 안고 어스름한 하늘을 보며 집으로 향했다.


  몇 주 후, 이번엔 R과 나, 단 둘이 사법부 역사센터를 방문하기 위해 다운타운에 다시 왔다.

  사법 역사센터 근방, 큰 나무에 그늘진 곳에 유료 거리 주차 후 R과 가볍게 걷는다.

  '벨트도 풀어서 보안 검색대에 올려놓으십시오.'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지만 역시 공공건물이라 입구에서 보안 검색을 했는데 벨트에 있는 버클까지 보안 검색에 포함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잠시 흠칫 놀랐지만 이내 수긍하고 주섬주섬 벨트와 소지품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는다. 하와이에서 지낸 후로 공공기관에서 소지품 보안검사를 받은 게 벌써 세 번째인데, 아직도 익숙해지진 않았다. 뭐, 언젠간 익숙해지겠지.

  널찍한 로비 좌측으로 사법부 역사센터가 보인다. 비숍 박물관처럼 한국어 오디오 해설이 없어서 세세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궁금한 건 R에게 물어 도움을 받는다. 실제 법정에서 다뤄졌던 흥미로운 재판, 판결이 적힌 사건 설명과 함께 그리 넓지 않은 오래된 법정을 가로질러 뒤편으로 이어진 전시장에는 하와이 사법 제도의 본격적인 역사와 수많은 인물들 기록을 볼 수 있다. 우리 말고도 몇몇 방문객들이 전시장 관람을 했는데, 소수의 사람들이었고 카메하메하 대왕 동상을 기념사진으로 찍는 수많은 방문객들이 이곳까진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물론 관광객들은 오전부터 일찍이 관광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에 오후보다는 오전 중에 많이 방문했을 수도 있겠지.

  대법원 1층 한편에 마련된 역사 센터를 나와 넓은 로비 안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자그마한 전시장 하나가 더 있는데,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던 1941년 12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약 3년간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의 통치 아래 일상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게 되었는지 기록된 곳이다. 섬 주민의 3분의 1이 일본인, 일본인 부모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미국정부는 특히 일본에서 태어난 비시민자들을 철저히 통제 감시를 했는데, 스파이로 의심되는 일본인들을 잡아들이고 수용소에 강제 수용하거나, 일본과 장거리 통화나 일본어를 사용 금지, 단파 라이오 소유금지, 통금시간, 10인 이상의 그룹으로 모임 금지, 공식적인 허가를 요청하지 않을 시 이동불가 등등,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하와이의 3분의 1인 일본인들을 신뢰할 수 없어 적으로 간주한 미국정부가 이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하와이를 나라의 이익인 군사적 요충지로 확실히 하기 위해 꽉 쥔 손아귀를 절대 풀지 않았던 역사를 재현해 놨다.


  이건 그냥 여담인데, 하와이에서 지내면서 아직 찾지 못한 걸 찾을 수 있길 바란다. 하와이의 역사, 폴리네이시안의 역사, '빈칸', 외국인, 미국인이 어떻게 섬으로 유입되었는지, 하와이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미국인에 대한 정보들은 박물관이나 전시장에서 쉽게도 기록되어 있지만, 하와이 그리고 폴리네이시안의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가장 중요한 기록과 사실은 '빈칸' 것 같다. 섬에 거주하거나 궁금한 모든 이를 위해 미국이 어떤 과정으로 하와이섬을 차지하게 된 건지 정리된 기록들을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아직 내가 찾지 못한 것이길.


  게이트 밖에서 서성이기만 했던 이올라니 궁전 앞 뜰에 들어서서 제대로 궁전의 전경을 감상하곤 궁전의 좌측으로 걷다 보면 티켓부스와 기념품 가게, 궁전 투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소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영사실, 화장실 이런 편의 시설이 한 장소에 있어 관광객들이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다. 티켓부스 앞에 자그마한 간의 책상 위에 이올라니 궁전과 투어를 소개하는 팜플랫을 놓고 방문객들에게 이용 가능한 투어 시간을 안내해 주시는 동양계 중년 여성이 앉아 환한 미소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궁전 투어 할 건 가요? 15분 후에 다음 투어가 시작될 예정이에요!'

  사실 다음 일정이 있었던 우리는 2시간 정도 되는 투어를 지금 보기엔 시간이 촉박해 친절하게 안내를 도와준 동양계 중년 여성에게 언젠가 다시 방문해 꼭 궁전 투어를 하겠다고 말하며 그녀가 알려준 기념품 가게로 향한다. 하와이 왕족에 관련된 여러 기념품들 중 역시나 엽서, 금속뱃지가 제일 눈에 간다. 모으는 것까진 아닌데 마음에 드는 엽서나 금속뱃지를 가끔 사는 취미가 있어서 이런 기념품 가게에 들르면 꼭 이들 앞에서 서성이는 나다. 하와이 왕족 문양과 하와이 주기의 금속 뱃지 중 어떤 걸 살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휘날리는 하와이 주기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서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집에 있는 에코백에 얼른 달고 싶은 기대감으로, 하도 매고 다녀 조금씩 해기지 시작한 애착 빈티지 크로스 백에 뱃지를 넣는 손도 들뜬다.


  이올라니 궁전을 한 바퀴 둘러보고 차로 돌아와 하와이 컨벤션 센터로 향한다. 

  'Made in Hawaii Festival'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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