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힘을 내어라
긴 A라인 스커트를 입고 암벽 같은 바위언덕을 기어올랐다. 치마가 바위를 스칠 때마다 삶이 한 겹씩 벗겨져 나갔다. 거추장스럽고 걸리적거렸지만 잘 넘었다. 그런 것들은 삶에 큰 의미로 부여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안다. 바위는 지저분하고 군데군데 벌레도 있었지만 그녀의 기분은 바위를 넘는 것에 집중했을 뿐 개의치 않았다.
험한 바위를 넘고 나니 깊은 우물이 나왔고 그녀가 매달려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스스로 우물 밖으로 나왔다. 큰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나온 것에 '다행이다' 혼잣말을 했다.
집에 오는 길 알몸이었으나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순간 옷이 그녀를 찾아와 주었다. 시크하고 단정한 H라인 스커트에 긴 베스트가 그녀의 알몸에 입혀졌다.
공명처럼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했다.
'그래, 그렇게 점점 단단해지는 거야.'
잠에서 깬 정소장은 온몸에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휴일임에도 새벽부터 전화가 왔고 카톡과 문자에 빨간 숫자로 가득했다.
"701호입니다. 소방 오작동이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저는 암환자라 충분한 수면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기계 좀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소장님, 1층 옷가겐데요, 하수관이 역류해서 바닥에 물이 찼어요. 빨리 좀 와 보세요."
"405혼데요, 복도에 물건들을 내놔서 난민촌 같습니다. 관리 좀 해 주세요."
"1층 족발집인데요, 우리 가게에서 버리는 기름 때문에 하수관이 막히는 거면 우리가 따로 배관 공사를 하겠습니다."
"소장님, 통닭집인데요. 배관 공사를 해야 한다는 말을 왜 소장님께 직접 안 듣고 족발집을 통해서 들어야 하나요?"
701호는 이후로도 집요하게 오후 2시까지 문자를 보내왔다. 상황 설명을 하고 조치를 취했다는 답변을 줘도 귀 닫은 양 자기 말만 해대는 문자를 보내왔다.
1층 옷가게는 그래도 응급처치와 다음날 배관공사 하는 것으로 조용히 이해해 주었다.
405호는 좀 과장된 부분이 있었으나 관리차원에서 고마운 민원이다. 복도를 전유 부분인양 집에 있는 쓰레기를 모두 내놓는 집은 도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민원도 들어왔겠다. 집중 단속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족발집과 통닭집은 기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 뜨거운 기름이 PVC배관을 타고 흐른다. 배관은 처지고 기름은 식으면서 화강암처럼 딱딱하게 굳어 배관을 막는다.
이로 인해 배관은 막히고 터지고 오물이 주차되어 있는 차량으로 쏟아져 세차비 보상도 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관리반장들은 일이 익숙지 않은데 잔머리가 많아 비화재도 꼼꼼하게 찾지 않고 대충 훑어보곤 복구버튼 눌러버린다.
그나마 다른 관리반장은 부지런하고 똑똑하긴 한데 성질이 욱해서 입주민들과 자주 부딪힌다.
토요일인 오늘 정소장은 출근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사표부터 썼다.
이놈의 단지 징글징글해서 한시도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불같이 써 내려갔다. 그리고 대한주택관리사협회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했다. 구인란을 클릭하고 소장구인을 검색했다. 갈만한 자리가 몇몇 군데 나오긴 했으나 출근 날짜가 너무 촉박했다. 괜히 이리저리 클릭 몇 번 하곤 한숨과 함께 J설비업체에 전화하는 걸로 업무에 돌입했다.
정소장은 잘 안다. 사표는 그저 화풀이 대상이라는 것을.
그렇게라도 화를 쓰지 않으면 가슴속으로 쌓여 그 속이야말로 돌덩이가 될 것 같았다.
정소장은 사표를 꾹꾹 눌러 접었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손끝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이듯 했다.
잘 접은 사표를 책상 개인용 서랍에 넣었다. 벌써 사표가 다섯 개가 쌓였다. 그러고 보니 정소장이 입사한 지도 벌써 6개월 째다.
"관리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관리비 연체 세대께서는..."
예약해 놓은 미납세대 납부독촉 방송이 흘러나왔다.
의무는 행하지 않고 권리만 내세우려는 사람들이 세상엔 참 많기도 하다. 쓸쓸한 세상이다.
정소장은 묵상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간밤 꿈에 아무도 돕는 이 없이 혼자 바위산을 넘고 깊은 우물을 넘고 알몸으로 길을 걷던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갔다. 그러다 좋은 옷이 찾아와 내 몸에 입혀졌던 내용에서 눈이 번쩍 떠졌다.
정소장은 책상 서랍에 쌓인 사표를 모두 꺼내 파쇄기에 갈았다.
'그래,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거야!'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지난번 아기 백일떡 가져왔던 702호 새댁이 남편과 밝은 낯으로 들어왔다.
"우리 다음 주에 이사 가요. 아파트로요. 25평이에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이거... '
새댁은 묻지도 않았는데 아파트로 가는 것에 기뻤는지 넓은 평수까지 알려주며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평소 관리비 한 번 밀리지 않고 성실해 보였던 새댁을 정소장은 잘 살길 바랐었다. 바람대로 된 것 같아 큰언니 같은 마음으로 뿌듯했다.
새댁 남편이 뜬금없이 정소장에게 물었다.
"혹시 전에 와이티 학원에 다시시지 않으셨어요?"
"네, 그런데요? 어떻게 아세요? 혹시..."
"네, 선생님. 저예요. 남중이."
"어머, 서남중"
"네네 저예요 서남중"
"어머 어머 어머"
"역시 선생님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시네요. 그동안 아내에게 선생님, 아니 소장님 너무 좋다고 큰언니 같다고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어떤 분인가 했는데 역시... 학원에서 우리 가르치실 때도 선생님은 좀 다른 분들과 달랐어요. 정말 놀랍고 반가워요. 이렇게 얼굴 보자마자 작별 인사를 하게 돼서 너무 아쉬워요. 참 그리고 저 그때 선생님께서 예언해 주셨던 것처럼 화학 전공 해서 지금 화장품 회사에 연구원으로 있어요. 가끔 일하면서 선생님 생각했는데..."
새댁 남편이 정소장의 오랜 제자인 것도 반가웠지만 당시 국어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좋게 남아 있다니 정소장은 그것만으로도 단정하고 고귀한 옷을 입은 것 같이 기뻤다.
새댁네가 가고 조용한 사무실에 라디오에서 박강수의 노래가 흘렀다.
다시 힘을 내어라 나의 손을 잡아라 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