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대회를 나가보자
무력
11월 11일 연말이 다가올 때쯤이면 계획병이 도지는 나는 이번엔 조금 색다른 것에 꽂혔다. 보통 신년계획 1.2.3은 돈을 얼마 모으겠다, 책을 몇 권 보겠다, 영어 아니면 중국어을 마스터하겠다 였는데. 이번엔 몸을 쓰는 걸 도전해보기로 했다. 제 49회 KBI 전국생활복싱대회. 공지 마지막에 '한국권투인협회'라고 붉은 인이 새겨져 있는 공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날짜는 내년 1월 23일. 장소는 마포구민체육센터. 참가비는 여자성인부 5만원. 체급은 55kg미만 구간부터 시작한다.
코치님에게 문자부터 보냈다. 사실 복싱장에서 몰래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집에 와서 아무도 모르게 문자로 대회 공지 사진을 전송했다. 복싱 시작한 지 이게 8개월. 나같은 쪼렙도 나갈 수 있는 대회인지부터 물어봤다.
"네 참가할 수 있습니다. 운동 지금보다 많이 힘들어 져도 잘 참고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ㅎㅎ"
참고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친절한 강압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워낙 친절하고 선을 넘지 않아 좋아해온 코치님이라 앞으로 더 신경써주신다는 말에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저 시합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나처럼 '직장인 복싱대회'에 관해 묻는 질문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다들 얼마나 두드려 맞고 내려올 것인지. 그래도 멘탈이 괜찮은지에 대한 경험담을 묻는 것이었다. 대부분 대긋들은 우호적이었지만, 이기기는커녕 한대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대회가 끝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갑자기 왠 복싱대회인가. 결혼식을 일주일인가 앞두고 복싱장을 등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강해지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 달리기나 클라이밍이나 어떤 운동이든 꾸준히 하면 체력기 강해지지만 문자 그대로 '무력(武力)' 때리거나 부수는 따위의 육체를 사용하는 힘, 또는 '완력' 육체적으로 억누르는 힘을 기르고 싶었다. 지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혼 준비로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다. 출입처가 바뀌었는데 코로나19를 신경쓰며 결혼식을 준비하는 게 무언가를 부수고 싶은 충동을 만들어냈는지 모르겠다. 6개월 등록한 복싱장에 하루 이틀 나가면서 샌드백 치기에 편안함을 느끼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했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에 대회 참가를 마음먹게 된 것도 여러가지 화학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우연히 밥을 먹게 된 타사 기자가 한때 보디빌딩 대회와 생활체육인 대회를 나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봄이었나. 코치님이 몇번 스파링 연습을 시켰는데 한 대도 못 휘둘른게 억울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리고 11월 11일 연인들의 날을 하루 앞두고 보게된 한 편의 동영상이 있었다. 앞의 기억들이 파릇한 초록이나 귀여운 연두색이었다면. <부산 지하상가 폭행> 이란 제목의 영상은 새빨간 경고의 색깔이었다.
며칠 사이 살이 붙은 이야기가 많아졌다. 쌍방폭행, 특수상해, 정당방위, 데이트폭력이란 단어 중에 무엇이 맞는지 모두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졌다. 싸움의 시작과 쓰러진 여성이 신고를 취소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 경찰조사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두고 며칠 동안 뉴스가 이어졌다. 단건의 폭력 사건이 연일 이슈가 되는 건 그만큼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 새삼스레 생긴 것은 아니지만, 커뮤니티를 통해 퍼져나간 영상 속 두 사람의 모습은 이전에는 없던 일이길 바라게 되는 끔찍함이 담겨 있었다.
샌드백을 치는데 이상하게 힘이 들어갔다. 몇 달 전 운동을 하다 다친 손목이 신경쓰이는 게, 부상 때문에 불편했던 사실보다 손목이 약해서 쉽게 다치는 몸이라는 생각에 괜히 짜증이 났다. 이를 악물고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데 나와 다른 어떤 면에서도 동등한 존재가 '완력'에 의해 날 기절시키고 분이 풀릴 때까지 주먹으로, 발로 내려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됐다. 남성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나는 원래 일평생 할 수 없게 정해져 있다는 게 맞는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