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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an 05. 2024

당신은 잔혹한 사람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태국 택시기사가 건넨 말

썸머 크리스마스. 2023년 크리스마스는 태국에서 보냈다.


겁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무엇보다 안전제일주의인 우리 가족은, 코로나 시작과 동시에 모든 여행을 중단했다. 위드 코로나가 된 후에도 우리의 여행은 재개되지 못했고,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이제 좀 예전처럼 해외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리고 아이가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될 테니, 여러모로 많이 무리를 해서 이번에는 한국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아무튼 떠나기 직전까지 많은 무리를 한 결과, 우리는 비행기와 호텔만 예약한 채, <프렌즈, 방콕> 책 한 권만 달랑 들고, 여행을 떠나게 됐다.


사람들이 12월에 여행 간다고 하면, 왜 태국을 추천하는지 이제 알겠다. 날씨가, 진짜 좋다. 분명 온도가 29도인데 덥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아마 습도가 낮아서인 것 같다. 일주일 가까이 있으면서 땀 한번 제대로 흘려 본 적이 없다. 태국 학생들이 왜 그렇게 한국의 더위와 태국의 더위는 종류가 다르다고 말했는지, 이제 완전하게 이해했다. 이곳의 더움은 내가 살면서 겪은 더움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에 돌아와서 태국 학생들에게 이 말을 하니, 그것도 맞지만 한 번도 땀을 안 흘렸다면 분명 선생님이 운이 좋았던 것이기도 하다며, 태국의 더위가 즐길 만한 더위는 아니라고도 했다.


공항 문이 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택시였다. 

태국 여행 정보를 검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교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방콕은 교통체증이 무척 심한데, 여행객들이 주로 사용하는 교통수단은 택시니까  꼭 택시 어플을 설치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을 해보니 실제로 그랬다. 우리는 5박6일 동안 <그랩>과 <볼트>라는 두 종류의 어플을 수도 없이 사용했다. 처음엔 카카오택시라고 생각했는데, 개인 차량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일종의 <우버>인 것 같다.


택시로 사용되는 차 종류도,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도, 택시비도, 모든 것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영어를 잘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태국어를 전혀 못 했다. 그런데 전혀, 이용에 문제가 없었고 그들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번역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에 자체적으로 내장돼 있는 음성 인식 번역기는, 쓸만했다. 

(아니, 태국어가 발음과 성조가 그렇게 배우기 어렵다던데, AI가 꽤 완성도가 있나 보다.)

그들은 보통 두 개의 폰을 사용했다. 하나는 내비게이션 용도, 하나는 콜을 받거나 손님과의 대화를 번역하는 용도. 처음에는 이렇게 매일 외국인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영어에 심드렁하다고? 이렇게나 매일 영어를 많이 들으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기초 영어는 익숙해지기 마련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그들은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출발지와 도착지, 요금, 탑승자. 그 3개만 알면 되고, 그 3개는 콜 시스템에 정확하게 입력되고 출력되므로 시비가 붙을 일도 갈등을 겪을 일도 없었던 거다. 탑승자와 스몰 토크를 잘한다고 해서 손님이 더 몰리는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그들은 전혀 외국어를 몰라도 아쉬울 일이 없었다. 세상, 신선하다.

영어에 이렇게 심드렁한 사람들이라니.


공항에 내려서 처음으로 만난 택시 기사님은,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1시간 30분 동안 내내 참 친절하셨다. (우리가 보기에 조금은, 아니 많이 위험하게도) 운전 중 내내 번역기를 사용해서 방콕의 곳곳을 안내해 주셨고, 방콕의 많은 문화를 소개해 주려고 노력했다. 기사님이 뭐라 뭐라 태국어로 말하면, 조금 후 AI가 뭐라 뭐라 한국어로 말하고, 남편이 뭐라 뭐라 한국어로 말하면, 조금 후 AI가 태국어로 말하는 구조.

그 반복이 조금 지루해질 무렵, 기사님이 문제의 그 말씀을 하셨다.


당신은 잔혹한 사람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택시 이용을 원하면 언제든지 제 번호로 연락 주세요.
24시간 이용 가능합니다.
차량을 충전해야 하니, 1시간 전에만 연락을 주십시오.


잔혹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니! 이건 갑자기 스릴러?! 여행지의 바가지를 조심하라는 말인 걸 알면서도, 나는 조금은 무섭고 그보다는 훨씬 많이 유쾌해졌다. 도대체 태국말의 어떤 단어를 AI는 '잔혹하다'라고 번역한 걸까. 한국어로 말할 때 '잔혹한'을 말하려면 '잔혹한 살인' '잔혹하게 살해당하다' 이런 말이 세트로 따라오는데, 진짜 기사님이 의도한 것이 저 단어라고? 한국 80,90년대의 인신매매가 떠오르기도 하고. 별의별 생각을 다하면서 나는 어휘의 세계가 얼마나 재미진지, 외국어를 외국어로 바꾸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고 어마어마하고 진지한 작업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왜 나는 번역가나 통역가를 꿈꾸지 않은 걸까. 다시 태어난다면, 통번역 공부를 해보고 싶다.

이번 생은, 평생 한국어 선생님 그리고 작가로 살고 싶지만.


태국의 한 친절한 택시 뒷좌석에서 발견한 서비스들. 다행히 나는 5박 6일 동안 '잔혹한' 기사는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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