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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an 13. 2024

필체를 보면 국적이 보인다

외국인 학생들의 에세이를 첨삭하다 보면 필체만 보고 누구의 글인지 딱 알겠는 때가 있다.

듬성듬성 성긴 글을 쓴다거나 촘촘하고 오밀조밀한 글을 쓴다거나, 리을의 머리를 둥글게 쓴다거나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페이지 전체에 띄어쓰기가 하나도 없다거나.

그런 것들을 보면 '이 학생은 어느 나라 사람이구나' 대충 짐작이 간다.


태국학생들의 글을 볼 때 나는 '내가 노안이 왔구나' 실감한다. 글씨가 매우 작고 정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빽빽하다. 가끔 자음 중 ㄹ(리을)의 머리를 둥글게 처리해 이것을 지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도 있지만, 그걸 빼면 대체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다만 이 학생들의 글을 볼 때 나는 돋보기가 필요한 거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학생들 앞에서 진짜 작게 쓴다는 의미로 종이 위 글을 가리키며 두 손가락으로 확대하는(휴대폰에서 글자를 확대해 볼 때처럼 집게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을 사용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 학생들은 하하하 웃는다. 교사를 위해 크게 달라고 수는 없으므로, 나는 그렇게 그냥 '너네 글씨 정말 작다'는 최소한의 표시를 한다.


이번에 태국에 여행 갔을 때, 나는 태국 학생들의 글씨가 왜 그렇게 정교한지 완전히 이해했다. 태국어는 정말 너무나도 정교했기 때문이다. 이게 그림인지 글자인지 모르겠고, 이 복잡한 글씨를 어떻게 종이 위에 인쇄하는지, 자판은 어떻게 칠지 너무 궁금하고, 무엇보다도 태국사람들은 다 정말 눈이 좋은가 보다.


세밀화를 보는 느낌의 태국어. 왠지 누르면 '바사삭'소리가 날 것만 같다.


이렇게 정교한 글을 쓰는 학생들이니, 학생들 입장에서 한글 정도는 정말 손쉽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축적은 동일한데 밀도가 줄어든 느낌이랄까.


태국 스타벅스에서 써 준 고객의 이름. 너무 작고 귀여워 이모티콘인 줄 알았다


한편 일본학생들의 글은 딱 보면 '일본 학생이 썼구나' 알 수가 있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고 우리처럼 조사도 있다. 한국어를 가르칠 때 조사는 매우 불편한 존재가 된다. 많은 학생들이 늦게까지 조사 사용을 버거워하고, 틀리느니 빼버리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그래서 '을/를'인지 '이/가'인지 긴가민가 할 때는 아예 안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학생들은 단 한 톨의 조사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이 꼼꼼하게 문장을 만들고, 정갈하게 글씨를 쓴다. 태국학생들의 글씨에 비해 일본학생들의 글씨는 크기가 큰 편이고 성긴 편인데, 이건 일본어의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비교적 단순한 획과 구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태국어에 비한다면야 일본어와 한국어 정도는 획수도 적고 밀도도 낮으니까.


한국어 선생님을 오래 하다 보니, 나는 어느 언어 하나 제대로 유창하게 하지 못하지만 많은 언어를 두루두루 관찰하게 된다. 어느 날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아랍어가 신기하고 어느 날은 그림처럼 작고 귀여운 태국어가 신기하다. 또 어느 날은 모두 다 영어의 필기체처럼 보이는 유럽 어느 나라의 언어가 궁금해지고 어느 날은 조금만 배우면 될 것 같은-그러나 오랫동안 했어도 늘지 않는-일본어를 더 공부해 보고 싶다. 


언젠가 나에게 시간이 많이 생기면, 그때 하나씩 하나씩,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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