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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an 18. 2024

의성어와 의태어를 사랑하는 선생님

아침에 운동화를 신으려다가,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었다. 오늘 가르치는 내용 중에 '또각또각' 구둣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도 또각또각 소리가 좋아서 구두를 신는 사람인데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교실에 들어가 의기양양하게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학생들에게 묻는다.


여러분, 선생님 발걸음 소리가 어떻게 나요?


우리는 요즘 각종 의성어와 의태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척 알아듣고 이것저것 말해 보기 시작한다. 반 구성원 중 가장 기발한 학생이 외친다. 구두구두? 하하하. 시작부터 흥미진진. 다 같이 웃고 연달아 여러 가지 대안이 나온다. 끄덕끄덕?(이건 얼마 전에 배웠다) 또박또박?(이것도 얼마 전에 배웠다) 최대한 비슷한 소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했으니 A+. 의미 없는 A+를 날리고 오늘의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원래 의성어랑 의태어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니 라임을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 말맛과 표준어가 싸운다면, 나는 말맛을 살린다. 국어선생님이 이래도 되나 싶은데 비표준어를 가르치지는 않으니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는 편이다. 사람들과 카톡을 주고받을 때 나는 내 상태를 의성어 또는 의태어로 말하기를 즐긴다. "너덜너덜" 이건 내가 아주 피곤해 지쳤다는 뜻이다. "치렁치렁" 이건 날씨에 안 맞게 내 원피스가 길고 더워서 몸에 감긴다는 말이다. "으쓱으쓱" 이건 내 아이가 자존감이 매우 올라가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웅성웅성" 이건 엄마 아빠가 뭔가 새로운 일에 맞닥뜨려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뜻이다.


'파김치가 됐어요.'라는 표현을 가르치던 날, 나는 너덜너덜을 진심으로 가르치고 싶었다. 멘털이 너덜너덜해졌어요. 하지만 내 언어 취향은 종종 일반적이지 않으므로 그 마음은 고이 접었다.


사실 의성어 의태어 외에도 나는 4자를 사랑한다. 사자성어의 4자도 좋아하고 그냥 내가 말을 만들 때 4자로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우영우 드라마가 인기 절정에 달했을 때, 우당탕탕 우영우 권모술수 권민우처럼 내 아이와 내 남편도 뭔가 앞에 닉네임을 붙여주고 싶었다. 남편과 아이는 (당연히) 둘 다 권 씨이기 때문에 OOOO 권혁정(이건 내 남편 이름), OOOO 권도현(이건 내 아들 이름)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권 어쩌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권고사직뿐. 이런 내 고민을 아이에게 말하니, 아이가 당장에 권장도서 권도현을 만들어 냈다. 역시, 40대의 머릿속과 중딩의 머릿속은 이렇게나 다르구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오늘은 눈이 펑펑 오더니 곧 거리에 소복소복 쌓였고 바닥이 미끌미끌 미끄러워서 조심조심 걸었다. 감기약을 먹고 나서 꾸벅꾸벅 졸다가 허겁지겁 서둘러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추운지 손을 쓱싹쓱싹 비비며 차에 타서는, 종알종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바빴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이의 뱃속에서는 꼬르륵꼬르륵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내가 바라고 내가 말하고 싶은 내 하루다. 써 놓고 보니 마치 어린이 책에서 텍스트만 옮겨 적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내가 꿈꾸는 하루는 이런 하루다. 의성어와 의태어가 남발하는 하루. 다정하고 살짝 소란한 하루. 내일도 그런 하루이길 바라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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