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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an 27. 2024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나는 회사원이었다. 기획팀에서 일했고 그래서 각종 기획안과 보고서를 많이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기획이란 실행으로 이어져야 할 텐데, 아무도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을 걸 아는 기획안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 익숙해졌고, 판타지 장르의 이야기를 쓰는 느낌으로 기획안을 찍어 내기에 이른다. 어차피 실행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덜 고민했다.


회사는 실무진은 그대론데 임원진은 계속 바뀌었다. 그래서 바뀐 임원이 올 때마다 회사의 현재를 브리핑해야 했다. 늘 해오던 일. 3개년 계획, 비전 수립 방안, AS-IS와 TO-BE, Level up 예정, RISK 관리 방안, 등의 대제목과 중제목들이 가득 찬 보고서를 들고 들어갔을 때, 임원이 그런 말을 했다.


근데 말이야, 이게 영어냐 한국어냐? 왜들 이렇게 영어를 섞어서 쓰지?


지금까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임원은 없었다. 나는 1초간 고민하고 바로 대답했다.

"주요 단어의 경우 아직 적합한 한국어가 만들어지기 전인 경우도 있고요, 주요 단어를 영어로 쓰면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니 주목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어떤 단어의 경우 외국어로 쓰면, 번역의 단계를 거치며 다시 한번 그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되므로.

그 임원은 컨설팅 분야 전문의 해외파였는데, 아마도 우리의 보고서를 보고 적잖이 놀랐을 거다. 영어 발음을 한국어로 쓰는 규칙이었다면 모두 콩글리쉬라고라도 하겠는데(예를 들면 '트렌드') 어떤 건 'Trend 경향' 또 어떤 건 '트렌드 경향' 이렇게 보고서 쓰는 사람 마음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건 퇴사 후 대학원에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전공하면서다. 전공 수업 시간에 이두, 향찰, 구결 등 한자를 빌려 한국어를 표기하던 그 옛날의 '차자표기법'을 공부하고 있을 때, '아, 이런 거구나' 싶었다. 조사만 한국어로 쓰고 개념어는 모두 영어로 쓴다면 그건 마치 이두와 비슷하다(물론 이두는 조사도 한국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지만). 이런 느낌으로 질문을 한 것이었겠구나.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영어+하다' 조합의 단어를 가르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메모하다', '다이어트하다', '조깅하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단어로는) '힙하다'등. 워낙 한국어에도 '하다'로 끝나는 동사/형용사가 많기 때문에, 학생들은 잘 모르겠으면 다 '하다'를 붙여서 말하기도 한다.

"선생님, 사진 찍어해도 돼요?" 이런 식. 마법의 동사. 영어+하다. 그리고 동시에 블랙홀의 동사.


모든 것을 문제라고 보는 것은 안 되지만, '문제의식'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당시 임원의 질문은 매우 예리했다고 본다. 그분은 지금도 그 회사에서 임원으로, 잘,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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