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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Mar 03. 2024

배가 어떻게 아프니?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말한다. 그럼 나는 되묻는다.


배가 어떻게 아프니?


아이는 아직 어휘가 풍부하지 못하고 아픈 경험이 적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본인의 상태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여러 예시를 들어 되묻고 되묻는다. "속이 답답하니?" "멀미하는 느낌이니?" "토할 것 같니?" "계속 설사를 하니?" 등등. 그럼 아이는 내가 말한 선택지에서 하나씩 지워가며 본인의 상태를 구체화한다. 가장 비슷한 답지를 고르고 거기에다가 추가 설명을 하기도 한다. "토할 것 같지만 토하지는 않아."라든가, "머리도 아프고 멀미도 하는 느낌이야."라든가.


나는 생각한다. '배가 아프다.' 말하고 끝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본인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혼자 병원에 보낼 수 있겠구나. 혼자서 병원에 가려면 '감기에 걸렸어요.'가 아니라, 기침을 하고 목이 아프고 열이 나고 등등은 설명할 수 있어야겠구나.

정도는 되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말있겠구나.


겨울이 되면, 환절기가 되면, 교실은 병동이 된다. 한국의 겨울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겨울인, 그런 학생들은 더욱 그렇다. 지난겨울에 내가 학생들의 책상에서 제일 많이 본 것은 편의점에서 파는 액상 종합감기약이었다. '종합 감기약'이란 모든 증상을 다 낫게 하는 약이겠지만, 콧물을 흘리는 학생도 기침을 하는 학생도 목이 아픈 학생도 모두 그 약을 먹고 졸면서 공부를 한다. 아무래도 남의 나라에서 약국에 가기란, 약국에 들어가서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란, 두렵고 어려운 일일 거다.


학생들은 한국어 중급 단계에서 <병원과 증상>에 대해 배운다. 그리고 본인의 증상을 설명하는 어휘와 표현을 배운다. 학생들은 매우 어려워하지만 나는 늘상의 나처럼 엄마 마음이 되어 열심히 설명한다. 꼭 필요한 단원이라고. 감기에 걸리거나 배가 아프면, 병원이나 약국에 가서 이 정도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한국의 병원에 가면 꼭 필요한 어휘들을 반복해서 가르친다. 처방전, 번호표, 진료실, 주사 등등. 거기에다가 코로나 동안에는 '자가진단', '자가격리'. '셀프키트', '백신' 등의 단어를 수도 없이 읽고 번역하고 주고받았었는데,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이 됐다. 정말 다행이다.


<병원과 증상> 단어를 가르칠 때 꼭 나타나는 학생 유형이 있다. "우리나라 말에는 없어요."유형.

학생들은 말한다. "선생님, 우리나라 말에는요~ 없어요. 그냥 아파요, 그럼 끝." 이렇게나 많은 '배가 아파요'가 왜 있냐고, 이렇게나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 몰랐다고. 그럼 나는 반대로 다시 묻는다. 약이 다를 텐데, 소화가 안 될 때도, 설사를 할 때도, 구토가 날 때도, 그건 그냥 다 "배가 아파요."냐고. 어떻게 설명하냐고. 그럼 학생들은 이렇게 설명하면 된다고 말한다. (약간 아픈 표정을 지으며) "조금 아파요."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죽을 것 같아요, 아파요." 하하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한다. 아니면 상황으로 설명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생리해요. 배 아파요." "술을 많이 마셨어요. 배 아파요." 이런 식.


이쯤 되면 나는 생각한다.

아이고, 학생들의 말이 진짠지 가짠지, 나는 당최 모르겠다.


<병원과 증상> 단원을 가르칠 때, 항상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소설 <병을 옮기는 남자>. 여기서 병을 옮긴다는 말은 전염이 아니다. 병의 증상을 말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주인공은 병원에서 일한다. 환자의 말을 의사에게 설명한다. 줌파라히리의 여느 소설에서처럼 주인공은 인도계이고, 인도 사람들과 영어권 의사 간 통역사로 일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아뇨, 아주 특이했어요. 남자는 목 안에 기다란 지푸라기가 꽂혀 있는 느낌이라고 하소연했어요. 제가 의사에게 그 말을 전했고, 의사 선생님이 단박에 적절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줌파 라히리, <직업의 광채-병을 옮기는 남자> 21쪽, 홍시, 2012


남자는 그저 '목이 아프다'가 아니라, '목 안에 기다란 지푸라기가 꽂혀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직업인가. 실제로 주인공 남자는, 관광 가이드로 일하는 중 만난 여자에게 단박에 연애 감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본인의 직업을 '낭만적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자기 아내는 자신의 직업을 '의사의 조수'라고 말해 왔기에 감흥이 배가 됐을 수도 있다.


소설은 (의외의 전개를 맞는) 새드 엔딩이지만,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런 단락이 매우 인상 깊었다. 그리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다. 뼈가 어떻게 쑤시는지, 배가 어떻게 아프고 어떤 탈이 났는지, 손바닥 반점의 색과 모양과 크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끊임없이 옮기고 또 옮길 뿐이었다.

같은 책 22쪽


병을 옮기는 남자라니, '옮기다'라는 단어가 '전염되다'라는 뜻이 있어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까지도,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학생들에게 <병원과 증상>을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의 생각의 흐름이라고 하기에 매우 뜻밖의 전개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언어로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진정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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