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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un 16. 2024

필멸하므로, 반드시 작별하는 우리들 이야기

3. 마거릿 렌클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는 영화 평론가 이동진 님이 파이아키아에서 소개한 책이어서, 어느 서점에 가도 중앙 매대 또는 따로 큐레이션 해 놓은 섹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책이다.


원제는 LATE MIGRATIONS, 부제는 A NATURAL HISTORY OF LOVE AND LOSS.

책에는 자연이 피고 지는 이야기와 작가의 가족들이 피고 지는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는데, 식물 또는 동물에 대한 부분은 나는 그리 깊게 공감되지 않았다. 여러 새가 나오고 여러 동물들이 나오고 여러 식물들이 나오지만,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지 않았고 나라마다 익숙한 동식물의 차이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적절하게 자연의 이야기와 가족의 이야기를 번갈아 했고, 그것은 나에게 독서의 집중력을 잃지 않을 만큼의 강약 조절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가끔 상황이 나빠질 때가 있고 그런 다음엔 다시 좋아지는 법이지.

마거릿 렌클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2024, 을유문화사. 11쪽


모든 것은 가고 오고 바뀐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나쁜 주기에 들어섰을 뿐이다. 곧 좋은 주기가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다, 별것 아니야. 다, 지나갈 거야.


생명의 순환을 차라리 죽음의 순환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같은 책, 13쪽


모든 생명은 필멸하므로, 생명의 순환이란 죽음의 순환에 다름 아니다. 한쪽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고 한쪽에서는 나이 든 가족이 죽는다. 그런 메타포 또는 클리셰를 영화나 소설에서 참 많이 봤는데, 영화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것은 딱 현실인데.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가요
같은 책, 110쪽


내 멋대로 해석한 바에 의하면, 우리는 많은 필멸들을 겪으면서 작별을 슬퍼하지만 나 또한 필멸의 과정에 있을 뿐이다. 이것은 나도 포함이다,라고 말하는 대목.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그날 하루 어머니를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같은 책, 132쪽


사춘기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대번에 무슨 말인지 이해할 만한 문장이다. 아이와 부모는 하루하루, 한 마디 한 마디, 모든 것을 공유했으니 너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하지만 아이의 하루에 부모는 점점 지분이 없어진다. 나 또한 그랬기에, 깊이 이해한다. 하지만 아이를 이해하는 것과 그래서 쓸쓸함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많은 것이 그렇다.


남편이 투병하던 마지막 나날 동안 그리고 그 후 어머니의 와병 기간 내내, 나는 그들을 위해 강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 나는 그들을 건사하고 싶었단다.
같은 책, 162쪽


'나는 그들을 건사하고 싶었단다.' 건사하고 싶은 마음. 나도 건사하고 싶다. 늙은 어머니를 건사하고 싶고 나이 든 아버지를 건사하고 싶고 아픈 언니를 건사하고 싶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잘 살고 있는데도, 나는 그들을 건사하고 싶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건사하고 싶은 마음을 '건사욕'이라 할 수 있다면, 나에게 있어 건사욕은 매우 높은 순위의 욕구다. 내 마음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나는, 남들 건사욕이 매우 크다. 하긴, 그래서 '욕(慾)'일 수도. 욕심 또는 욕망이니까.


아버지를 돌보고 어머니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보살핀다는 건, 비록 내가 성인답게 행동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성인 상태로 이끌려 왔음을 의미했다.
같은 책, 209쪽


새로운 종류의 성인이란다. 앞으로 나는 또 얼마나, 새로운 종류의 성인으로 거듭나야 하나. 그 생각을 하면 인생이 마냥 팍팍하다. 작가의 문체가 원래 이렇게 신선한지 아니면 작가와 번역가의 합이 만들어 낸 시너지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신선한 표현을 많이 접했다. 하지만 가끔은 단락에서 한 두 문장은 뛰어넘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고 어떠한 은유는 단락 내 맥락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번역서이기에 발생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서 작가 소개를 보니 시인이다. 시인이 쓴 에세이여서 이렇게 사색적이고 아름다웠나 보다. 그래서 가끔 내가 행간을 읽지 못하기도 하고.


"고아랑 결혼해라."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에 항상 집에 올 수 있어."
사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고아랑 결혼해라. 안 그러면 무덤으로 가는 길고 긴 길 위에서 고뇌를 선사하는, 평생 간호해야 할 부모 넷이 생길 거야."
같은 책, 263쪽


우리는 이 단락에서, 작가의 나이가 58세임을 고려해야 한다. 작가는 결혼을 해서, 많은 질병을 겪고 돌아가신 시부모가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돌봐야 할 부모가 넷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나저나 중요한 명절 또는 이벤트에, 시댁으로 향하는 것은 서양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크리스마스에 딸이 본인에게 올 수 있었으면 좋겠는 진심을,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라니.


언젠가 박준 시인의 에세이를 읽다가, 박준 시인의 아버지께서 했다는 말이 나는 두고두고 기억났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그 단락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리고 찾아봤다.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평소 잘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대학에 갈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을 공산이 큰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무 불행하고 고된 일이라고 했다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2017, 난다


이런 말을 전할 때의 부모는, 부모라기보다는 그냥 전우 같다. 세상에 태어나 삶이라는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인간군상으로서 하는 말. 너도 나도, 부모이고 자식이고 좌우지간 우리는 그냥, 삶이라는 전쟁을 치르는 군인의 신분 아니더냐, 그런 맥락 아닌가.


돌봄의 결말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 돌봄의 결말은 큰 슬픔이라는 것.
같은 책, 267쪽


자식 돌봄의 결말은 '자유'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다. 이것저것 마음을 접고 접어, 몇 가지의 쓸쓸함과 슬픔들을 외면한다면, 중장년의 외로움을 자유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 돌봄의 결말은 포장이 어렵다. 그것은 그냥 슬픔 그 자체다.


너의 핵심 동기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야
같은 책 292쪽


책 어딘가에서, 부모를 중병으로 보내는 와중에 그리고 보낸 후에, 건강염려증으로 여러 가지 증상을 겪고 검진을 반복하는 작가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고 나서 작가는 깨닫는다.


나는 건강하다, 이것은 다만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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