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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un 02. 2024

중년을 건너 노년으로

1. 이화열 <서재 이혼 시키기>

“닮음과 다름, 독립과 의존에 관한 아주 특별한 이야기“
 : 이화열 <서재 이혼 시키기> 2023, 앤의 서재     


책 표지는 낯선데 책 제목은 익숙하다. 다른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책을 봤을 때 앤 페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를 떠올렸다. 실제로 이화열 작가님이 <서재 결혼 시키기>를 패러디 또는 오마주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음 주 내가 읽고 있을 책은 <서재 결혼 시키기>가 확실하다.     


이 책에는 중년과 노년이 다 들어있다. 작가에게는 프랑스인 남편과 두 자녀가 있는데, 두 자녀는 지금은 모두 독립했다. 단비와 현비는(작가의 아들, 딸 이름) 처음에는 중학생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등학생이되더니 마침내 대학 졸업 후 취업도 하고 독립도 한다. 이번 주 나는 작가님의 가족들-남편인 올비 씨와 첫째 단비, 둘째 현비-의 지인으로 살았다. 이화열 작가님의 전작인 <지지 않는 하루>를 읽은 직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한 작가의 팬이 된다는 건 이런 건가 보다. 오랜 세월 대화로 다져진 관계인 듯 나는 빠르게, 그리고 깊이, 작가님의 삶과 생각에 동화되었다. 가끔 내 책을 읽은 누군가가 또는 내 책을 읽은 지인이 아주 깊게 ‘나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도 잊고 있었던 내 책 속 문구에 관계된 감상을 말한다거나, 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내 마음의 원인과 맥락을 파악해 말해 줄 때, 나는 그렇게 느낀다. 독자와 작가의 관계란, 텍스트로 연결된 관계란, 참으로 정성 어린 관계다.


서재를 이혼시키면서 문득 나는 ‘닮음’의 열망 때문에 ‘다름’이라는 현실을 간과하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재 이혼 시키기> 여는 글 중     


타인의 진심을 바랄 때가 있다. 그건 가족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다. 타인의 어떤 행동이 진심이기를 내가 바랄 때도 있고, 타인이 나에게 진심을 바라는 게 느껴질 때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우리는 안다. 진심이 아니기에 진심이길 바라는 거다. 안타깝게도 종종 진심이 아니어서 우리는 서로 슬프다.     


”계획하는 것도 인생이라고!“
그러면 내가 묻는다.
”계획을 실행하는 게 무슨 인생이야?“
하지만 그는 집요하게 계획을 세우고, 나는 집요하게 우연과 조우하는 기쁨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재 이혼 시키기> 41쪽     


첫 챕터는 작가의 프랑스인 남편 ‘올비’에 대한 이야기다. 부부란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신비롭게 사람이 다를 수 있는가. 읽다가 나는 혼자 종종 키득거리기도 했는데, 이걸 누구에게 읽어 줄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너무나 이 내용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함께 읽으며 웃고싶어지는 글.


내가 내 남편에 대해 지인들에게 말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다.

”이번 생은, 힘들 것 같아. (그와 나의 간극을 좁히기란).“     

상대의 취향은 이해와 분석의 영역이 아니다.
우선 ”왜?“라는 의문사 대신 ”아!“라는 감탄사로 바꾸는 것이다.
너와 나는 이렇게 다르지만 너 같은 존재, 나 같은 존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73쪽     


책에 수많은 인덱스가 빼곡히 붙었는데, 나는 이 단락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서로 다름을 긍정하고 감탄하는 관계. 나는 종종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든다. 사람들은 모두, 내 맘 같지 않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은 단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내맘 같은 존재’란 비문이다.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명쾌하다.     


이제 그런 상상 속에 아이들이 없다.
언제든 어느 곳이든 훌쩍 떠나 살아볼 수 있는 삶, 문득 가슴이 설렌다.
같은 책, 113쪽     


올비에게 할애된 지면이 끝나고 나면, 자녀들의 지면이 시작된다.    

  

자식을 곁에 묶어두고 싶어 하는 부모의 잘못된 권력은 사랑, 희생, 가족주의라는 가면을 쓴다.
최고의 부모는 자식을 곁에 묶어두지 않는다.
같은 책, 137쪽     


가족주의라는 단어를 읽으며 나는 마음이 조금 내려 앉았다. 나는 아직도 내 엄마 아빠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산다. 내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농담으로 종종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씨족 사회야, 이모랑 외삼촌이랑 사촌 동생들이랑 다 한 동네 살거든.“ 나는 아주 좋았고 잘 지냈다. 아이를 낳았을 때 100일까지는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했다. 늘상 누군가가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나는 아직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다.     


살아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성장하고 독립하는 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우리도 더 이상 같은 존재가 아니다. 사랑으로 살찌워진 내 영혼도 독립한다. 줄 수 있는 것을 아낌없이 주었고, 받을 수 있는 것을 충분히 받는 행복하고 공정한 거래였다. 나를 애착의 습관에 붙들어놓지 않을 것이다.
같은 책, 169쪽     


가족주의도 습관이구나. 만약에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거래라 말하기로 한다면, 과거는 잊기로 하는 게 좋겠다. ‘공정한 거래였다고 말하기로 한다’ 이렇게 선언적으로 말하고 끝.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현재에 이르게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가족을 부정하고 싶지 않고, 나와 함께하느라 울고 웃었던 가족들의 수고를 '명예롭게' 지켜주고 싶어서다.

  

문득 생각한다. 만약 운명이 아름답게 늙는 것과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늙는 것 중에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선택하리라.
같은 책, 211쪽     


”슬픈가요?“
”우린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이젠 새로운 시간이 온 거죠.“
같은 책, 243쪽     


작가가 남편 올비에게 할애한 지면을 지나, 두 자녀에게 할애한 지면을 지나, 마침내 노년에 대한 지면이 나온다. 삶에 대한 작가의 많은 통찰이 느껴지는데, 나는 계속 ‘신뢰’를 느꼈다. 작가 본인의 노년에 대한 신뢰.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본인의 노년을 향한 저력을 믿으라’고 시그널을 보내는 느낌. 노년을 잘 보내려면, 종종 즐기려면, 무엇보다 본인의 노년을 믿어야 한다. 준비는 거기서 시작한다.


시어머니는 병실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오디오북을 듣고 있다.
이제 돋보기를 쓰고도 책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시력이 나빠졌다. 문학은 쇠락하는 육체에는 무용하지만, 항상 똑같은 얼굴로 쓸쓸한 노년을 동반한다.
같은 책, 227쪽     


그리고 나에게는 책이 있다.

무용하더라도, 변덕 부리지 않고 내 곁에 끝끝내 책이 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은 진정, 믿을 만한 존재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영영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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