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클립 영상 작가

by 미니힐

한두 달을 쉬고 또 다른 제작사로 들어갔다. 나의 첫 입봉 작품이 탄생했던 곳. 나름 잘 적응하고 성취감도 느끼고 실력도 인정받았던 곳이었다. '나는 역시 혼자 일해야 하는 건가?' PD님 한 분과 나. 대부분 이렇게 둘이 일했고, 가끔 메인작가님이 오셔서 함께 회의를 했다. 자료조사, 섭외를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무슨 논문 수준으로 자료들을 긁어모았다. 섭외는 늘 하던 대로 예의 바르게 ‘사정사정’하며 진행했다.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예쁘게 보신 PD님이 입봉의 기회를 주셨다. 입봉 작품은 짧은 수학 클립 영상이었는데 중학생 대상으로 수학 내용을 재밌게 풀어서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려운 수학이라는 편견 아닌 사실에 모든 스텝이 겁을 먹는 프로그램이었다. 오히려 다 모르는 영역이니까 나는 무데뽀식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중학교 교과서까지 차근차근 읽어보고 인터넷에 있는 자료를 다 모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원리를 이해하게 됐고, 그 원리를 재밌는 소재로 스토리텔링해서 구성해봤다. 피디님도 쉽고 재밌게 푼 것 같다고 하셨고 우린 후반작업까지 즐겁게 마무리했다. (수학적 부분은 자문 선생님이 따로 계셔서 그분께 컨펌을 받았다.) 오랜만에 주변 환경과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즐겁고 신나게 일했다.


그 제작사에 다른 프로그램 작가도 상주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보수적인 거 같으면서도 진보적인 성향인 거 같고 소심한 거 같으면서도 적극적인 거 같고. 순종적인 거 같으면서도 저항하는 성향이 있는 거 같다고. 신기한 캐릭터라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아주 작아지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굉장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 돌진한다는 것, 나를 자극하는 요소가 생기면 극도로 힘들어한다는 것. 환경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나란 인간. 극과 극인 나의 성향에 있어서 나 또한 당황스러울 때도 종종 있다.


아무튼 이곳에서 처음으로 구성안, 나레이션까지 영상 하나를 다 맡아서 진행해 보았다. 이로써 드디어 입봉을 하게 된 것. 처녀작이라 열심히 했고, 일한 만큼 아웃풋도 좋아서 뿌듯했다. 무려 CP님한테까지 칭찬을 받았다. 일단 공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심적으로 평안했고, 관계 문제도 없었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제 입봉 작가로 꼭지를 맡아서 일하고 싶었다. 당장 그 제작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꼭지 프로그램은 없었다. 나는 다른 프로그램의 코너 작가로 일하고 싶었다. 빨리 코너작가로 일하고 싶었다. 에둘러 급한 사정 때문에 일을 그만둬야 할 거 같다고 말했다. 피디님은 아쉬워하셨고, 마무리 업무도 좀 남아있는 상황에서 당황해하셨다. 마무리 업무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퇴사 후에도 집에서 작업해서 넘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전설의 인수인계서를 만들어 놓고, 퇴사의 수순을 밟았다. (그 디테일한 인수인계서는 지금도 혀를 내두르며 후임 작가들이 참고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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