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작가

by 미니힐

며칠 또 쉬다가 구인구직사이트를 기웃거렸다. 군인 프로그램 시트콤 작가를 구하는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다. 예능 극작가는 처음이었는데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지원했다.


연락이 왔고 면접을 봤다. 다소 위엄 있는 면접이었다. 보통 메인작가님과 1:1로 면접을 보곤 했는데 이곳에선 메인피디님, 메인작가님, 서브 피디님 등 많은 제작진과 면접을 봤다. 큰 원탁 테이블에 제작진이 있었고,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셨다. 열심히 답했고, 면접 후 돌아가는 길에 같이 일하자고 연락이 왔다. 아직 이전의 잦은 퇴사와 실패로 인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였는데 또다시 방송 일에 뛰어들었다. 이번엔 정말 오래 잘하고 싶었다.


시트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극을 만들어 상황을 만들고, 대사를 쓰고, 연기도 하면서 글을 썼다. 다만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아서 남자 피디님의 경험담을 토대로, 또 지인들, 인터넷상 군대썰을 보며 극을 만들었다. 가끔 글을 쓰다가 나도 모르게 대사가 튀어나오면 옆에 있던 동료작가가 재밌게 일하는 거 같다고 웃었다. 그만큼 시트콤 장르가 신선하고 재밌었다. 그런데 나레이션은 여전히 어려웠다. 특히 시트콤 위에 얹는 나레이션은 더 어려웠다.

회의를 자주 했는데 자주 의견을 냈고, 자주 질문을 했다. 메인작가님이 조금 피곤해하셨다. 내가 너무 의욕이 앞섰는지 아이디어도 서슴지 않고 얘기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언행도 많이 했다. 메인작가님이 언짢아하셨다. 제작사와 다르게 출근 시간이 빨랐는데 자주 지각을 했다. 밤늦게까지 원고 쓴 다음 날은 인간적으로 늦게 출근해도 용인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얄짤없었다.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잦은 지각에 혼나고, 나레이션은 여전히 어렵고, 나의 아이디어는 무시당하고, 결정적으로 빵 터진 어느 날. 메인작가님이 통화로 뭐라고 지적했는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예의 없는 행동이었는데 자꾸 혼나고, 이유 없이 수정하라는 일이 많아지니 나도 많이 지쳐있었다. 계속 눌려있고, 지쳐있고, 납득이 안 되는 상황에서 또 지적받는 전화를 받으니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래도 계속 버티는 게 맞나?’ 나는 또 그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갔다. 그 상황을 못 견뎌 했다.


메인작가님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지 말고 좀만 더 일해달라고 했다. 나는 이미 우리의 관계가 어긋났고, 다시 가서 일하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그 공간에서 일할 수 없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작가님은 어이없어했다. 아니 창피하다고 일을 못 한다니. 그 정도 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몰아세웠다. 나는 끝까지 못 가겠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작가님은 두 번 다시 얼굴 볼 일 없을 거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또는 그녀와 다시 새롭고 긍정적인 관계로 연결되는 게 어렵다고 느껴졌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은 그 상황을 견디고, 견뎌야만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 분위기와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죽을 만큼 견디기 어렵다. 왜 그렇게 극대화시켜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어그러진 상황에 나를 다시 노출시키기 어려웠다. 결국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니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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