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작사 막내

by 미니힐

여러 번의 이직과 도망침. 이제 자신도 없고 실패의 흔적만 남아 위축돼 있었다. 몇 달 동안 집에서 쉬면서 ‘나를 보호할 수 있으면서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생각했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영화제작사를 알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가치관도 맞는 영화제작사였다.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첫 직장을 구할 때처럼 간절한 마음과 열정이 타올랐다. 메일을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다. 사실 그곳에서는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일을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화제작사 이사님한테 연락이 왔다.


일단 와보라고. 긴 이야기 끝에 인턴도 아닌 체험도 아닌 그냥 일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지금 당장 내가 할 롤이 없었다. 그냥 배우고 싶으면 와서 배우라는 식이었다. 단, 페이 없이. 밥도 준다고 했고, 정말 배울 수 있는 기회 같았다. 그렇게 해서 영화제작사를 들어갔다.


나와 긴 얘기를 나눴던 이사님은 암암리에 인맥 넓은 큰손이셨다. 덕분에 드라마 리딩 현장도 가보고 영화기획회의, 홍보 공연 등을 따라다니며 구경 다녔다. 나는 제작사 청소, 설거지를 도맡아 하면서 연예인 얼굴도 훔쳐보고 한동안 재밌는 공부를 했었다. 가끔 영화 리뷰 숙제도 내주셨고,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수다 떨고 싶을 때 긴 시간 나를 잡아두고 말씀을 나누셨다. 그곳에서 만난 어떤 분이 같이 글도 써보자고 제안하셨는데...뭔가 겁이 났고, 부담스러워서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수입 없이 딱히 롤도 없이 청소만 하다 보니 뭔가 존재 이유도 없고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재정 형편이 여유롭지 않아서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이래도 되나?’ 점점 의문이 들었고, 걱정이 됐다. 이곳에서 계속 이렇게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도 무언가 책임을 맡고, 나의 일을 하고 싶었다.


이사님께 대면해서 말씀드리기는 또 떨리고...지금의 심정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써서 메일로 보냈다. ‘그래라 그럼. 말도 못 하고 끙끙대고 있었구나.’라고 답변이 왔다. 뭔가 겁나서(?) 직접 만나 뵙지 못하고 편지로 이야길 했는데 이해해주셔서 놀랍고 감사했다. 그렇게 해서 잠깐의 영화제작사 체험을 하고 나왔다.


이사님이 나에게 해주셨던 피드백이 인상 깊었다. ‘너는 여우같이 일하는 게 필요한 거 같다.’ 이사님이 가끔 드라마 작가를 소개해주셨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어필해야 할지 몰랐고, 사실 나를 어필하는 자리인지도 몰랐다. 작가님들을 만나면 앵겨 붙고, 애교도 부리고 더 싹싹하게 하면 좋을 거 같다고 했다. 나는 영화사 깍두기로 들어온 처지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깍두기처럼 나의 롤에 열심히 임하다가 싫증이 나버렸던 거 같다. 또 ‘사람에게 눌리지 말고,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해’라고 말씀해주셨는데...맞다. 나는 사람, 관계, 환경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는 성향이다. 자주 눌리고 내가 낄 자린지 아닌지 늘 혼란스러웠다. 나의 존재 이유가 없는 곳에서는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이사님은 나에게 기회를 많이 주신 거 같은데...나는 그게 기회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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