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매영 Nov 09. 2020

호구 일기

돈이 살살 녹는다.

  누워 입을 벌린 채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저번에 치료하기로 한 곳은 두고 이상한 곳을 이야기한다. 의사는 세 곳을 인레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번에 치료하기로 한 곳을 두고 이야기할 정도면 얼마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알겠다고 한다. 마취를 했다. 마취가 도는 중에 가격을 물어보니 세 곳 합쳐 60만 원이라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다. 실장은 말을 잘한다. 나도 저렇게 말을 잘하면 어딘가에서 뭐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진다. 그의 언어 능력이 부러운 건 부러운 거고 설득이 되지 않는다. 실장이 5만 원을 깎아준다고 한다. 능력 있다. 져줄 때를 안다. 치료를 진행하기로 했다.     



  예전에 어떤 시인이 인터뷰에서 시를 어떻게 쓰냐는 질문에 한 대답이 잊히지 않는다. 자신에겐 수많은 페르소나가 있고 시를 쓸 때 그중 하나의 페르소나가 호명된다던 이야기. 비단 그 시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중 능숙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개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예술가이거나 사기꾼이겠지. 난 그 얼마 되지도 않는 페르소나에 자꾸 속아 호구가 되는 것 같다. 치과 치료가 완벽하다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지만 전에 크라운 치료 한 곳이 계속 불편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도망치는 것도 용기라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용기 없는 사람이다.  


   

  어느 날 군대에서 자고 일어나니 입 안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침을 뱉으니 피 떡이 나왔다. 의무대에 가니 이를 잘 닦으라고 했다. 이를 열심히 닦았다. 이를 열심히 닦아도 매일 아침 일어나면 입 안에 피범벅이었다. 이를 더 열심히 닦았다. 열도 났다. 열은 나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대대에 고열 환자가 유행이었다. 이를 더 열심히 닦았고 피를 열심히 뱉었다. 그러다 휴가가 왔다. 제일 먼저 치과에 갔다. 스케일링을 했다. 피가 많이 나와 두 번에 걸쳐 마무리했다. 피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발목에 붉은 점이 있어 동네 의원에도 갔다. 군인이라 하니 피부병이라고 하며 약을 지어주었다. 약을 열심히 먹었지만 붉은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 백혈병 판정받고 나니 피부병이 아니라 점상 출혈이었다. 입에서 피가 나온 건 백혈병 같기도 한데 스케일링으로 좋아진 것을 보니 반반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여하튼 유격훈련 일주일 전 느낌이 이상해서 엄살로 사단 의무대에 가기 전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다. 지 몸이 이상한 것도 모르냐고 물어보신다면 전문가들의 페르소나가 주는 신뢰감보다 내 감이 주는 신뢰감이 못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결국 사단 의무대에서 몰래 낮잠 자다 생긴 연분홍 멍으로 백혈병을 알았으니 다행인 것 아닌가. 훈련 뛰기 싫어 엄살 핀 것이 얻어걸린 것이라지만 만약 훈련을 뛰었다면 행군하다 죽었을 것이다. 그냥 호구라기보다는 운 좋은 호구라 다행이다.      



  이번 주에는 앞니에 레진을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곳을 하지 않을까. 레진을 한다고 했는데 크라운을 씌워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나는 운 좋은 호구지만 치과는 운과는 별개인 것 같다. 뭐라도 좋으니 돈이나 많이 깎아줬으면 좋겠다. 애당초 치료를 하지 않을 생각은 못하는구나. 조금 비참하다. 아니다 진짜 앞니 치료하고 뭔 일이 있어도 더 이상의 치료는 없도록 할 것이다. 의사가 진실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결심했다. 비장한 호구가 아니 비장한 환자가 되어야지. 다음에는 꼭 여러 치과를 둘러볼 것이다. 다음에는 - 

이전 11화 어느 날, 복기(復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